출석을 거부하는 구속 피고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증언을 거부하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어떻게 봐야 할까.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권리이고 기본적인 인권이라지만 일반인이었다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처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진은 2015년 12월21일 박근혜 대통령이 인천 송도에서 열린 삼성바이오로직스 제3공장 기공식에 참석해 동영상을 보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회색 재킷을 입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14일 오후 5시께 절뚝거리며 법정에 들어왔다. “몸조리 잘하길 바란다”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 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의 당부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전 대통령은 주 4회 법정을 찾고 있지만 이날은 조금 특별했다. 사흘간의 결석을 마치고 이번주 첫 출석이기 때문이다. 재판 쉬는 시간에 “너무 마음이 아파. 이게 재판이냐고. 진실을 말해야지 진실을. 삼대가 저주받아라” 하며 울었던 한 중년 여성은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며 계속 손수건을 훔쳤다.
10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김세윤 부장판사가 “피고인들은 들어와서 피고인석에 착석하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재판을 시작했지만, 회색 재킷을 입은 최순실씨만 나타났다. 재판 시작 직전인 이날 오전 9시55분 서울중앙지법 형사공보관은 “박근혜 피고인이 구치소에서 오전 재판에 갈 차량에 탑승하지 못했다”고 기자들에게 알려왔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유 변호사처럼 박 전 대통령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때부터 함께한 채명성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근혜 피고인께서 지난주에 왼발을 심하게 찧어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 재판에 출석하셨다. 그리고 나서 토요일에 접견을 가보니 상태가 더 심해져서 거동 자체가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치료는 하고 있는데 내상이 심해서 신발을 신으면 통증이 아주 심해지고, 통증 때문에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기 힘든 상황이다. 안 그래도 주 4회 재판으로 심신 지쳐 수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재판 나오면 상처 악화 부작용 있을까 봐 조금이라도 치료한 후에 출석하는 게 좋다고 해서 오늘은 불출석했다. 내일부터는 출석할 예정이다.”
김 부장판사는 “박근혜 피고인이 발가락 통증으로 출석이 어렵다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피고인에 대해서는 오늘 변론을 분리해 공판 기일을 연기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출석이 힘드실 것 같다”
하지만 11일에도 박 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유영하 변호사가 나섰다. “어제 늦게 교도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의무과장이 진료한 뒤 인대 쪽 손상이 있다고 들었다. 오늘까지 출석이 힘드실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의 공소유지를 맡은 한웅재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장은 “박근혜 피고인 왼발 네 번째 발가락이 예전부터 안 좋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도 김 부장판사는 “변호인이 접견 후 상태를 알려주고 진단서 발급받을 수 있으면 받아서 재판부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재판을 그대로 진행했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 ‘깜짝 출석’으로 정신이 없었던 12일. 정씨의 말인 살시도, 비타나 브이(V), 라우싱1233, 블라디미르, 스타샤의 이름을 다 외울 때쯤 카카오톡이 울렸다. 12일 오후 7시19분 형사공보관은 “서울구치소에서 오늘 오후 재판부 앞으로 팩스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습니다. 불출석 사유는 건강상의 이유이고 13일, 14일 양 기일에 출석하기 어렵다는 취지입니다”라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이 사흘째 불출석한 13일 오전 재판이 시작되자 김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의 상태를 물었다.
“어제 박근혜 피고인 접견해서 체크해보기로 했는데 어땠나요?”(김 부장판사)
“(서울구치소) 의무과장이 채혈했고 다친 부분은 인대 쪽입니다. 휠체어로 이동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재출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신발 자체가 통증을 유발해서 현 단계는 보행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공판 기일 출석은 피고인의 의무입니다. 서울구치소에서 아직 의견서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출석이 곤란할 정도라면 불출석 상태로 진행하고 출정 가능한 상태라면 내일이라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재판정 출석은 당연합니다. 일부러 했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재판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학적 의견이 구치소에서 도착하는 대로 내용 보고 상의드리겠습니다.”
오후 2시10분께 재판이 시작되자 김 부장판사가 다시 말했다.
“구치소에서 의견서가 왔는데, 박근혜 피고인이 좌측 발가락을 귀소 내에서 부딪쳐 통증이 있어 계속 치료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부종, 압통 있어서 걸을 때 통증을 호소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가지고 재판부에서 합의를 해봤는데 형사소송법상 원칙적으로 피고인은 정해진 공판 기일에 출석 의무가 있고, 출석을 안 할 정당한 사유를 거동이 곤란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비록 박근혜 피고인의 치료가 마쳐지지 않았지만 현재 상태가 출석하지 않을 사유에 해당하기는 부족하다고 재판부는 보고 있습니다. 변호인이 접견해서 내일 공판 기일에 참석해달라고 설득하는 게 어떨까요?”
“재판이 끝나면 결국 내일 아침 9시에 접견해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할지… 17일은 출석 가능할 거로 보고 있습니다.”(유 변호사)
“재판 끝나면 접견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다음 증인 반대신문 먼저 하시고 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그러면 지금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출석이 계속 거부되는 경우에는 관련 법령 따라 출석 조치하고 재판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무과장님과 얘기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떠난 지 2시간이 못 된 오후 4시께 돌아온 유 변호사가 “(14일) 오후에는 재판에 출정하겠다”고 밝혔다. 김 부장판사는 검찰의 양해를 얻어 14일 오전에 예정된 증인신문을 조정했다. 박 전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11일과 13일 방청석도 덩달아 텅 비었다. “평소에는 방청객 모두 퇴정할 때까지 남아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없어서 먼저 퇴정하겠다”는 말을 마치고 재판부는 재판이 끝나자 자리를 비웠다.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로 재판을 늘 마무리했던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13일 오전 ‘언니’ 없는 서울중앙지법에 ‘동생’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 나타났다. ‘피고인 박근령’의 신분으로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박 전 이사장은 수행비서와 함께 공공기관 납품 계약을 시켜주겠다며 2014년 사회복지법인 대표에게서 1억원을 받은 혐의(사기)를 받고 있다. 자신의 혐의에 대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말한 박 전 이사장은 “주 4회 8시간, 10시간씩 (재판을) 하니까 후유증으로 발가락 다친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 걱정을 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때문에 5000명이 희생됐는데도 모택동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가 나왔다. 아버지 우표 발행도 못 하게 하는 건 역사의 시간이 거꾸로 가는 거고 민주주의가 완전히 훼손됐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걱정도 잊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결석’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재회’도 불발됐다. 10일 오후 2시10분 남색 양복을 입은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을 찾았다. 다른 삼성 전직 임원들처럼 ‘증언 거부’를 예고한 상태였다.
“증인이 수사 과정에서 작성한 조서에 대하여 증인이 진술한 사실대로 기재가 되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증언 거부권 행사하는 게 맞습니까?”(박영수 특별검사팀 강백신 파견검사)
“네.”(이 부회장)
“증인과 에스케이그룹 최태원 회장과의 상호 문자 및 전화를 주고받은 내역입니다. 2016년 2월15일은 증인이 박 전 대통령과 독대가 있던 날이고, 2월16일은 최태원 회장님과 박 전 대통령의 독대가 있었던 날입니다. 2월15일부터 2월17일 사이의 문자 및 통화 내역을 확인해보니 2월15일은 3번, 2월16일은 11번, 2월17일은 5번 등 독대 전후해 문자메시지 주고받거나 전화 주고받은 게 19건에 이르는데 당시 어떤 내용으로 최태원 회장님과 문자 주고받거나 전화했는지 기억나는 부분 있습니까?”
“재판장님. 제가 오늘 이 재판정에서 진실 규명을 위해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드리고 싶은 게 제 본심입니다. 그러나 저희 변호인들의 강력한 조언에 따라 제가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원활한 재판 운영에 도움을 못 드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사님들 질문에 어떻게 제가 답변을 드려야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증인의 형사 책임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면 ‘증언을 거부하겠다’고 하면 되고요, 답변해도 됩니다. 증언을 거부하겠습니까, 답변하겠습니까?”(김 부장판사)
“거부하겠습니다.”
“2016년 2월16일 오전 9시49분에 증인이 최태원 회장님께 전화해 265초 약 4분 이상 전화통화 한 내역이 확인됩니다. 어떤 통화 했는지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증인을 포함한 삼성 고위직 임원 4명이 동시에 증언을 거부한 것은 증인과의 합의 또는 증인 지시에 따라 결정한 것은 아닙니까?”
“거부하겠습니다.”
보통의 피고인이라면
이 부회장은 특검 관계자의 8가지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고, 약 10분간의 증인신문을 마친 뒤 재판부에 깍듯하게 인사하고 법정을 떠났다. 출석을 거부하는 구속 피고인 박 전 대통령과 증언을 모두 거부하는 이 부회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증언 거부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권리이고, 구속 피고인이라 해도 건강과 같은 기본적인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다만 과연 일반인이었다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처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재판 자체는 진행됐기 때문에 지연 의도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다만 보통의 피고인은 양형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잘 하지 않는 행동이다. 일반인들에게 1년, 2년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사면을 염두에 두고 몇 년을 선고받을지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김남근 변호사(법무법인 위민)가 말했다.
박 전 대통령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경제인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될 전망이다. 2016년 3월14일 오후 2시10분부터 약 30분 동안 박 전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했던 신 회장은 케이(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준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뇌물)로 기소됐다. 이 부회장과 달리 신 회장은 함께 기소된 박 전 대통령, 최씨와 함께 재판을 받고 있다. 신 회장은 롯데 관련 심리가 진행됐던 5월23일, 6월30일, 7월6일, 13일, 14일 다섯 차례 법정에 출석했다. 뇌물 혐의 재판과 별개로 횡령 등의 혐의로 롯데 총수 일가와 함께 재판을 받는 신 회장은 3월부터 서울중앙지법을 오가고 있다.
“2015년 11월14일 롯데와 에스케이가 면세점 사업자에서 탈락한 뒤, 청와대 방침이 ‘면세점의 대기업 독과점 규제’에서 ‘서울 시내 면세점 특허 추가’로 바뀌었느냐.”(면세점 업무 담당한 기획재정부 실무자에게 13일 검사가 한 질문), “증인은 2016년 3월14일 오전에 최씨에게서 롯데와 만나 자금 지원 요청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박 전 대통령과 신 회장의) 단독면담 3시간 지나서 이석환 롯데그룹 상무와 17일 만날 것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나?”(정현식 전 케이스포츠재단 사무총장에게 6일 검사가 한 질문). 박 전 대통령, 최씨와 같은 피고인석에 앉아서 신 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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