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법정 다큐 수인번호 503
③ 삼성과 에스케이
③ 삼성과 에스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시로 독일로 건너가 최순실씨와 최씨의 딸 정유라씨 승마 지원을 논의한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박 전 사장이 지난 2월16일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차량에 오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 전 대통령 재판 나온 삼성맨들
약속한 듯 모두 “증언 거부”
특검 “이재용 위해 사법제도 무시” ‘뇌물 공여’ 피한 SK 최태원 회장
특검 질문에 우호적…“맞습니다”
청와대 ‘검은 제안’ 거부한 SK
수용한 삼성·롯데와 운명 갈려 황성수 전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스포츠기획팀장(전무)도 6월26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증인석에 섰다. 이날 증인신문이 예정된 황 전 전무,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최지성 전 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차장(사장) 모두 재판에 앞서 증언거부 사유 소명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증인(황 전 전무)은 2월28일 최순실 등에 대한 뇌물공여죄 등으로 불구속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죠?”(특검 파견검사) “….”(황 전 전무) “증인에 대한 뇌물 사건에서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조서들에 대해 모두 증거 사용에 동의했죠?” “죄송합니다.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라우싱1233(정유라씨가 타던 말)을 반입한 게 맞습니까?”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사람이 바뀌었지만 답변은 같았다. 황 전 전무도 “증언을 거부한다”고 12차례 말했다. 특검과 검찰은 “수사기관에서 그런 진술을 한 사실이 있는지에 대한 진술은 증인에게 불리하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자신의 재판에서 동의한 증거들이라 이 재판에서 진정성립을 증언해도 더 불리해질 게 없어 증언거부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황 전 전무의 진술을 지켜보던 재판부는 “증인들은 검찰 주장에 대한 증언거부 사유를 소명해달라”며 이날 예정된 최 전 부회장, 장 전 사장의 증인신문을 미뤘다. 장성욱 특검보는 6월19일 박 전 사장의 증인신문에 앞서 삼성 쪽의 증언거부에 대해 “이 부회장을 위시한 그룹 차원의 결정으로 사법제도를 무시하는 삼성 관계자들의 오만한 태도를 보여준다”며 반발했다. “삼성 측은 특검에 모두 증언을 거부하겠다고 밝혀왔다. 이들의 의도는 이 부회장의 이익을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씨, 이 부회장의 진술이 상반되는 점을 부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 이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가 집중된 중요 사건으로 누구든지 실체적 진실 발견에 협조할 의무가 있는데 삼성 측 관계자들은 유독 재판 진행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대기업 총수가 연루된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재판 절차에 협조하지 않은 전례가 없다. 이런 삼성의 태도는 이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들이 우리는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례다.” 7월10일 증인신문이 예정된 이재용 부회장도 증언을 거부할 전망이다. “네!” “증언을 거부합니다”라는 말만 남겼던 삼성과 달리 최태원 회장 등 에스케이(SK) 관계자들은 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뇌물 요구’ 전모를 밝혔다. 뇌물 혐의는 박 전 대통령의 18가지 혐의 중 가장 중한 혐의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1억원이 넘는 뇌물을 받은 경우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검과 검찰이 주장하는 박 전 대통령의 뇌물액은 592억원에 이른다. 592억원은 삼성에서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 지원과 미르·케이(K)스포츠재단으로 받거나 받기로 약속한 433억원, 롯데가 케이스포츠재단에 추가로 낸 70억원, 에스케이에 요구한 89억원으로 나뉜다. 뇌물죄는 준 사람과 받은 사람 모두 처벌받는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공동 피고인이고, 이 부회장은 삼성 임원들과 매주 3차례 이상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세 대기업 중 에스케이만 ‘사주’가 피고인 신분에서 벗어났다. 검찰은 제3자 뇌물수수의 핵심인 에스케이의 ‘부정한 청탁’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롯데는 실제로 돈이 지급됐지만 에스케이는 거부했다”고 최 회장을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밝힌 바 있다. 6월22일 형사대법정 증인석에 선 최 회장은 검사의 질문에 대부분 “네”라고 답하며 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에 힘을 실었다. 2016년 2월12일 오후 5시8분께 최 회장은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과의 전화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단독면담을 제안받았다. 임원들과 여러 차례 준비회의를 거친 최 회장은 2월16일 오후 5시부터 40분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만났다. 최 회장은 법정에서 면담 때 오간 대화 내용을 자세히 밝혔다. “대통령이 증인에게 ‘잘 지내시냐’는 취지로 일반적인 인사를 건넸고, 증인은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이 아직 교도소에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저희 집이 편치는 않습니다. 저는 나왔는데 동생이 아직 못 나와서 제가 조카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완곡하게 말씀드렸죠?” “네.” “대통령이 규제를 풀어 투자, 고용을 증진시킬 방법이 있는지 묻자 증인이 규제프리존 관련해 아이티(IT) 테스트베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안 수석이 함께 들어야 한다며 직접 일어나 데리고 들어왔죠?” “네.” “대통령이 안 수석을 데려오면서 ‘에스케이는 미르·케이스포츠재단에 얼마를 출연하였지요?’라고 물었고 안 수석이 ‘111억원을 출연했다’고 답했죠?” “네.” “안 수석의 답변을 들은 대통령이 ‘에스케이그룹이 미르와 케이스포츠 재단에 출연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취지로 말씀하셨죠?”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말씀 하신 것 같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 ‘최 회장에게 가이드러너(시각장애인 선수 도우미) 사업이 시각장애인 돕는 좋은 사업인데 에스케이그룹처럼 대기업이 도와주면 좋겠다는 취지로 권유했다’고 진술했는데 면담 때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죠?” “들은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미르·케이스포츠재단 말씀 뒤에 안 수석이 대통령에게 에스케이 현안에 대해 말씀드렸죠?” “네.” “안 수석이 ‘워커힐호텔 면세점 사업 지속 문제가 있다’(2009년부터 에스케이그룹이 운영한 면세점이나 2015년 11월14일 면세점 특허사업자 선정에서 탈락)고 말씀드리자 대통령이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 중입니다’라고 말했죠?” “네.” “이에 증인은 ‘직원들의 고용이 걱정입니다’라는 취지로 말했죠?” “일자리 창출 관련 이야기가 있어 말씀드렸습니다.” “안 수석이 또 다른 현안으로 ‘에스케이텔레콤과 씨제이(CJ)헬로비전 인수합병 문제(에스케이는 2015년 12월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두 회사 합병 승인을 신청한 상황)도 있다’고 대통령께 말씀드렸죠? 그래서 증인이 ‘신속하게 결론을 내달라’고 말씀드렸죠?” “네.” “그동안 대통령 외에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등 다른 대통령과 독대한 적이 있습니까?”(유영하 변호사) “없습니다.” 면담을 마친 최 회장에게 안 수석은 최순실씨 소유의 광고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 전병석 이사의 명함, 팸플릿, 에스케이에서 수주 가능한 광고 분석이 담긴 서류봉투를 건넸다. 하지만 이 사안은 전 이사가 연락을 주지 않아 자연스럽게 무마됐다. 그런데 2월23일 안 수석은 이형희 에스케이 브로드밴드 사장에게 연락해 “케이스포츠재단 관련 자료를 보낼 테니 잘 검토해서 협조해주면 좋겠다”고 말했고, 청와대를 찾은 이 사장은 안 수석의 보좌관인 김건훈 당시 청와대 행정관에게 더블루케이 소개 자료, 가이드러너 연구용역 제안서, 비덱스포츠(현 코어스포츠, 최순실씨의 회사)의 펜싱 등 유망주 지원을 위한 해외훈련 계획이 담긴 서류봉투를 받았다. 이 자료가 “안 수석의 윗분이 말씀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 사장은 김영태 에스케이 부회장에게, 김 부회장은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박영춘 에스케이수펙스추구협의회 시아르(CR)팀장(부사장)에게 이 자료를 전달했다. 그렇게 2016년 2월29일 에스케이그룹 본사 시아르팀 회의실에서 박영춘 부사장은 케이스포츠재단 정현식 사무총장과 박헌영 과장, 장순호 비덱스포츠 한국지사장을 만났다. 박 부사장은 6월20일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1차 미팅 때 박 과장이 사업제안서를 보여주며 가이드러너 연구용역비 4억원, 5년간 가이드러너 양성학교 설립 운영비용 35억원, 펜싱 등 독일 전지훈련비용 50억원을 지원해달라고 했다. 케이스포츠재단 쪽에서 50억원은 에스케이 현지 법인에서 독일 비덱스포츠로 바로 송금해달라고 요청해 매우 놀랐고, 곤란하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말했다. 이형희 사장은 “회의를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안 수석이 전화해 박영춘 사장이 빡빡하게 군다. 대통령이 관심 갖고 지시한 사안인데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느냐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대통령 관심 사안이니 청와대에 불쾌감을 안 주면서도 그룹에 법률 리스크를 안 주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이형희 사장은 2016년 3월28일 안 수석에게 메일을 보낸다. “1번(가이드러너 연구용역)은 즉시 지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만 2번(가이드러너 양성학교 설립 운영), 3번(해외 전지훈련)은 직접 관여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케이스포츠 설립 취지를 지원하는 의미에서 모든 요청을 포괄해 20억~30억원을 추가 출연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금액이 적절할지 이런 방식이 적절할지 고민이 있어 의견을 여쭤봅니다.” 이와 관련해 이 사장은 “대관업무를 하면서 청와대로부터 특정 개인 업체 지원을 요청하는 서류를 직접 받은 적은 없었다. 메일을 보낸 건 대통령의 진의를 확인하고 청와대와 안 수석이 기분 좋게 거절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이 메일을 두고 최순실씨의 변호인 이경재 변호사는 “뇌물 제공 의사 표시가 된다는 생각은 안 했냐”고 압박했지만, 이 사장은 “과다한 비용이 청구돼 있는 것으로 보였고 저희로서는 한다, 안 한다 둘 다 위험해서 예의 바르게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메일에 답하지 않던 안 수석이 2016년 5월 초 이형희 사장에게 연락해 “더 이상 지원 안 해도 된다”고 말하면서 ‘에스케이 뇌물 요구’는 막을 내렸다. 이형희 사장은 증인신문 동안 ‘리스크’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청와대 측 요구 내용이 무리하고 법률적인 리스크가 있어 나중에 뒤탈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외국환관리법이라든지 배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청와대의 제안을 거절한 에스케이와 그러지 못한 삼성·롯데의 운명은 이후 크게 갈렸다. 정경유착은 모두 유죄 에스케이는 89억원은 내놓지 않았지만 미르·케이스포츠재단에 111억원을 출연했다. 출연 규모만 보면 삼성(204억원), 현대자동차그룹(128억원)에 이어 3번째다. 최태원 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서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의 석방과 그룹 현안을 언급한 것도 사실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부는 기업에 돈을 요구하고 기업은 자신의 현안 해결을 부탁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에스케이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삼성, 롯데, 에스케이 모두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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