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노래 가사라며 칠판에 적은 ‘우리의까지(?) 오프닝’이라는 제목의 랩. 이 아이, 언어 진화력이 너무 높은 걸까.
[토요판] 남지은의 조카 덕후감
6.‘옹알이’는 끝났다
그날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모를 깨우러 온 당시 4살이던 조카 남대현(6)은 나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포비야,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안 그럼 어흥 하고 호랑이가 잡으러 올 거야.” 포비는 누구고 호랑이는 또 뭔가. 온갖 애니메이션에서 본 대사를 짬뽕해서 내뱉은 듯한 조카의 말이 이해는 안 갔지만, 놀라웠다. ‘아니 얘가 지금 문장으로 얘기하고 있잖아.’
그저 귀여운 인형 같은 존재였던 조카가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대화가 통하면서부터다. 옹알이를 거쳐 알 수 없는 언어, 단어의 조합으로 의사를 표현했던 조카는 어느날부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 광고나 함께 사는 외할머니가 즐겨 보는 드라마, 자기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자주 나온 대사를 빌렸다. ‘사장님’이란 단어가 나오면, 어디선가 봤던 사장님이 들어간 대사 뒷부분이 기계처럼 흘렀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아파트 12층에서 1층으로 이사 가는 소감도 엄마 말에서 따왔다. “대현이 1층으로 이사 가면 매일 뛰어다닐 거야.” 올케가 뛰는 대현을 말리며 “1층으로 이사 가면 매일 뛰어놀아”라고 한 말을 기억해둔 것이다.
‘표절’과 ‘패러디’를 일삼던 조카의 언어는 스스로 생산해내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유치원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자 이렇게 말했단다. “선생님, 예쁜 목소리 어디 갔어요?” 장난치는 대현을 나무라자 울며 말한다. “고모, 나쁜 목소리 내면 마음도 나빠진단 말이야 앙.” 동생이 장난으로 올케를 괴롭히니 정의의 사도가 됐다. “남자가 여자를 괴롭히면 안 돼!”
깊은 내면을 예쁜 언어로 표현하던 조카는 이제 말로 웃길 줄도 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티브이에서 대선 관련 방송이 줄창 나오던 어느날, 엄마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자 이랬단다. “엄마 미워. 엄마 사퇴해!”
내 해석대로, 판단대로 조카의 마음을 정리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언제 이만큼 컸나 대견하기만 하다. “싫다”는 의사 표현을 명확하게 하니, 이젠 내 마음대로 데리고 다닐 수 없어진 현실은 아쉽지만, 하나둘 스며든 세상의 언어들을 자신만의 생각으로 정리해서 얘기하는 조카를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판단력이 생기고 가치관이 뚜렷해지며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감격스럽다. ‘예쁜 목소리’라던 입에서 ‘엄마 사퇴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주변의 환경이 아이의 언어 표현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나도 예쁜 말을 하자 되새기게 된다. 조카한테 배운다.
그런데, 대체 이건 어디서 스며든 걸까.
지난주 휴일 조카는 노래 가사라며 칠판에 랩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의까지(?) 오프닝’이라는 제목의 가사는 이렇다. “나까지 가는 거야. 나의 그대를 망가트리지마. 오늘부터 내일까지 가면듸. 하루밤이야/ 내가 살거야. 오늘까지야. 내일까지야. 오늘갈거야. 내가 살거야/ 오늘 내일 어재부터 진하개 만들자/ 이재까지 내일까지엿어. 우리함깨가지 오늘부터~/ 이재돌아가자. 그림개. 돌아가자. 안녕”
이 아이, 언어 진화력이 너무 높은가.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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