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의 ‘벚꽃 터널’. 류준열씨 제공.
꽃그늘 아래에선 누구나 사진 찍느라 바빴다.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도, 결혼을 앞둔 연인도 카메라를 들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에서 ‘마지막 벚꽃놀이’가 열렸다. 이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35)씨도 트위터 친구 4명과 함께 동네 봄나들이를 했다. 이들은 특히 2단지 ‘벚꽃 터널’을 즐겼다. 하지만 주민들의 자부심인 이 벚꽃 터널을 내년 봄엔 볼 수 없다. 62만6232㎡(약 19만평) 면적에 4단지 143개 동 5930세대가 사는 이 대단지 아파트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5월에 관리처분인가가 발표되면 주민들은 7월부터 이주를 시작한다.
1980년대부터 아파트와 함께 자라기 시작해 숲을 이룬 단지 내 수목들이 재건축과 함께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둔촌주공 말고도 반포주공, 고덕주공 등 울창한 수목을 거느린 재건축 예정 아파트가 서울에 적지 않다. 서울시는 가로수 등으로 자치구에 재활용하도록 권고하지만, 옮겨 심는 비용이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 9일 둔촌주공아파트에 만개한 벚꽃. 사진 박수지 기자
■ 38년간 울창한 숲 이뤘는데 둔촌주공의 메타세쿼이아는 10층 아파트 높이를 훌쩍 넘는다. 아파트가 지어진 1980년엔 키 작은 묘목이었지만 38년 세월이 이만큼 키워냈다. 이씨는 “3단지엔 과실수나 작은 꽃나무가 많아 아기자기하고, 4단지엔 키 큰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서 있어서 멋있다”며 “흔히 ‘아파트는 콘크리트 숲’이라고 생각하지만, 서울에서 대단지 아파트만큼 숲 노릇을 하는 곳도 드물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씨가 기획하고 사진학도 류준열(21)씨가 촬영한 아파트 나무의 사계가 담긴 <아파트 숲>이란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떠나면 나무는 어떻게 될까. 재건축 사업계획 터 넓이가 30만㎡를 넘으면 ‘환경영향평가법’에 따라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 ‘수목 활용 계획’도 평가 항목 중 하나다. 둔촌주공 재건축 조합은 2015년 강동구청에 ‘단지 내 나무 2579그루를 다른 곳에 옮겨 심겠다’는 계획을 보고했다. 전체 수목 3만3094그루 중 8% 정도다. 둔촌주공 재건축 조합 관계자는 “나무 한 그루 옮기는데 평균 100만원 정도 든다. 옮겨 심더라도 살리기 어려워서 그런지 가져가겠다는 사람도 많지 않다. 30년씩 돼 제자리를 잡은 나무들이 참 아깝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둔촌주공아파트 전경. 나무들이 숲처럼 울창하다. 류준열씨 제공
■ 비용 때문에 이식 수 적어 그나마 작성한 ‘수목 활용 계획’도 비용 등의 문제로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는 2015년 재건축 단지의 나무 중 이식 계획이 없는 나무를 시가 운영하는 ‘나무나눔공간’ 누리집에 올리도록 했지만, 12일 현재 ‘기증’ 글은 6건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를 옮겨 심는 것보다 묘목을 사 심는 게 더 저렴하기 때문에 기증받겠다는 쪽도, 기증하겠다는 쪽도 드물다. 지난해 10월 강남구청이 개포시영아파트 단지에 있던 나무 중 10%가량인 264그루를 영동대로 녹지, 세곡사거리 일대, 공원, 관내 학교 등으로 옮겨 심은 것이 흔치 않은 재활용 사례다.
한봉호 서울시립대 교수(조경학)는 “아파트 단지는 초기에 주로 묘목을 심기 때문에 20년은 지나야 제구실을 한다. 재건축에 들어가면 공사 효율성을 이유로 나무 대부분을 베어낸다”며 “특히 둔촌주공은 녹지 비율이 40%가 넘어 주민들뿐 아니라 도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녹지다. 가치 있는 나무를 과학적으로 평가해 옮기거나 존속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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