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조종 세력이라며 박정희 정권이 조작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 중 한명인 김종대 전 4월혁명회 공동의장이 지난 5일 서울 수송동 4·9통일평화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당시 일본어학원을 운영했던 김 전 의장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뒤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감옥을 나왔다. 김종철 선임기자
[토요판] 인터뷰
인혁당 피해자 김종대
▶ 42년 전인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의 피해자 8명이 처형됐습니다. 국제법학회는 이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의문사조사위원회(2002년)와 국정원과거사위원회(2005년)의 조사 결과 사건이 조작됐음이 밝혀졌고, 관계자들은 뒤늦게나마 재심에서 누명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피해자 중 한명인 김종대 전 4월혁명회 공동의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국가한테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지. 사주팔자인가라고 생각하다가도 억울해서 말이 안 나오죠. 정말 이게 나라인가 싶죠.”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20년 징역을 선고받고 8년을 옥살이했던 김종대(81) 전 4월혁명회 공동의장(이하 직함 생략)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43년 전 느닷없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던 시절을 얘기할 때는 가끔 웃음도 짓던 그였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인혁당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상대로 저지르고 있는 일에 이르러서는 감정이 격한지 한참 동안 말을 멈췄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오후 서울 수송동 4·9통일평화재단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 관계자 24명은 사건 발생 30여년 만에 이뤄진 재심(2007~2008년)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관련자 16명(사형된 8명 제외)을 포함한 가족 77명은 2009년 6월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이겼다. 그동안 겪은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 등을 고려해 전체 금액의 65%인 436억원을 그해 8월 먼저 지급받았다. 하지만 2011년 1월 대법원은 배상금에 대한 지연 이자를 사건 당시(형 확정된 1975년 4월9일)부터 계산한 원심 판결은 잘못됐다면서 이자 산정일을 민사소송의 2심 재판 변론이 끝난 시점(2009년 11월과 2010년 7월)으로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체 배상액이 절반 정도 깎여서 이미 받은 돈의 상당액(250억원)을 도로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교사 부임 뒤 첫 제자가 노무현
당연히 당사자들은 반발하면서 반환을 거부했다. 그러자 국가는 2013년 7월 국정원을 내세워 이들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결국 정부 편을 들어줬다. 돈을 안 내놓으면 연 20%의 지연 이자까지 물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애초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정할 때 지연 이자를 연 5%로 매겼던 국가였다. 인혁당 피해자 중 한명인 이창복(79)의 경우 반환하라는 5억원에다가 몇년간의 지연 이자를 합하면 애초에 그가 받은 배상금 10억여원을 훌쩍 넘는다. 이창복은 전재산인 집 한채마저 국가에 압류당했고, 강제 경매가 곧 끝나면 거리에 나앉게 된다. 집이 경매에 부쳐진 사람만 해도 7명이다.
-화투판에서도 낙장불입이라는 원칙이 있는데, 어떻게 국가가 자신이 저지른 불법행위의 피해자들한테 지급한 배상금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는가?
“말이 안 된다. 배상금으로 받은 8억원 남짓 되는 돈은 그동안의 빚 갚고, 신세진 사람 등에게 나눠주다 보니까 바닥이 난 지 오래다. 나는 지금 딸한테 얹혀산다. 얼마 전 판사 앞에서 재산이 하나도 없다는 선서를 하고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우리 애들은 각자가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국가에 빼앗겼다. 기가 막힌다.”
-40여년 전 엉터리 기소와 재판으로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가뒀던 국가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마디로 개판이다. 두번 세번 나라로부터 고충을 당하는 생각을 하면 어떨 때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이 잘못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종대는 1974년 5월1일 저녁 삼락일본어학원에 들이닥친 중정(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붙잡혀 중정의 남산분실로 끌려갔다. 당시 나이 38살이었다. 학원을 같이 운영했던 친구 이수병이 십여일 전에 먼저 끌려갔다. 둘은 부산사범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였다. 사범학교 졸업 뒤 김종대는 1956년 고향(창원군 대산면) 근처인 김해시 진영읍의 대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4학년이던 노무현이 그의 첫 제자 중 한명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부산에서 처음 재회했다.
김종대가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온 것은 1969년이었다. 박정희가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을 한 뒤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수병이 고향에 내려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서울행을 권했다. 진영중학교와 사범학교 친구이던 유진곤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유로 상경했다. 서울에서의 첫 사업인 건재상이 망하자, 이수병과 김종대는 1972년 초 김종대의 퇴직금 남은 것을 보태 지금의 교보문고 뒤쪽에 삼락일본어학원을 열었다. 학원장인 김종대와 이수병이 다른 강사 몇명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정 요원은 고문, 검사는 정강이 차
-함께 일하던 친구 둘이 잡혀갔는데 도망치지 그랬나?
“나도 곧 붙잡혀 갈 것이라고는 예상했었다. 그러나 죄지은 게 없으니 금방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4월3일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이라고 규정한 뒤 관련자들을 사형까지 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974년 초부터 유신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 주요 대학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데 대한 초강경 대응이었다. 물론 민청학련이라는 명확한 조직 자체가 없었으며, 이름은 반정부 유인물에 즉흥적으로 적혔던 명칭에 불과했던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정권은 학생조직뿐 아니라 이들을 배후조종한 세력이라며 ‘인혁당 재건위’라는 가공의 조직까지 만들었다. 1차 인혁당 사건(1964년) 역시 굴욕적인 한일수교 협상에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만든 조직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이용훈 등 담당 검사들이 기소에 반대해 사표를 냈을 정도였으며, 결국 2013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 판결이 났다.
-삼락일본어학원에 다녔던 경북대 졸업생 여정남을 고리로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를 엮은 것 아닌가?
“여정남이 여익환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 어느날 이수병이 여정남을 좀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나는 학생운동을 한 적도 없고 해서 그럴 능력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러면서 서울대 졸업하고 경기여고 교사 하던 김용원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때 내가 여정남을 맡았더라면 김용원은 죽지 않았을 거다.” 상경 직후 반년 가까이 김용원의 집에서 기숙했던 김종대는 이 대목에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인혁당 재건위에 연루됐던 사람들 가운데 사건 전에는 아예 몰랐던 사람도 많았다던데.
“이창복, 김용원, 황현승 등은 서울에서 만나서 알게 됐지만, 대구 쪽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만날 일이 없었으니까. 하재완은 재판받을 때 내 앞자리에 있었는데 그때 이름과 얼굴을 처음 봤다. 그런 조직이 세상에 어딨나.”
김종대도 다른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남산 중정 지하실에서 심한 구타와 통닭구이 등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수병이 사회주의 책을 그에게 권유했다는 자술서를 쓰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팬티까지 다 벗기고는 손목과 발목을 붕대로 감은 뒤 끈으로 묶었다. 그 끈 사이로 끼워넣은 긴 나무 막대기를 들어서 책상 양쪽 사이에 걸쳤다. 몸이 대롱대롱 막대기에 매달리게 돼 통닭구이로 불린 고문이다. 매달기가 끝이 아니었다. 바닥으로 처진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숨을 참다가 물이 기도로 넘어가서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 고문을 받다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고, 담뱃불로 몸을 지졌다. 한번은 담뱃불로 몸이 꿈틀하자,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네. 조심하자’라는 소리를 비몽사몽간에 들었다. 아마 네댓번 기절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고문으로 기진맥진하게 만든 뒤 취조가 시작됐다.”
그러나 신문조서는 사전 각본대로 중앙정보부 요원이 작성했다. 곁눈질로 ‘공산주의 운운’이라고 쓰는 것을 보고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민주교육을 시킨 사람이다. 어째서 내가 공산주의자냐”고 항의하자, 그는 “이 새끼, 너를 공산주의자로 만드냐? 이수병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지”라고 했다. 김종대가 “나와 같이 사범학교를 나온 친구인데 이수병이 왜 공산주의자냐”고 따졌지만, 되돌아온 것은 발바닥 몽둥이질이었다. 진술조서 날인을 거부한 그에게 수사관 3명이 달려들어서 강제로 지장을 찍어 갔다.
-조작된 조서를 바로잡을 기회는 없었나?
“검사를 만나면 고문받은 사실과 조서가 조작된 것을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검사가 내가 취조받았던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로 와서 조사를 하더라. 중정 요원이 먼저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가서는 “검사한테 부인하면 죽는다”면서 몽둥이로 어깨를 때린 뒤 검사한테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몽둥이를 들고 내 뒤에 내내 서 있었다. 검사는 건방지다면서 다짜고짜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세번이나 찼다.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구체적인 것을 묻지도 않았다. 날짜가 안 맞는 것 몇개 고치고는 끝이었다.” 그는 자신을 구타하고 고문했던 중정 취조관 손종덕과 계장 윤종원 그리고 각본 조서를 추인했던 검사 이규명의 이름을 뼛속에 새겨놓았다.
-그때 혹시 친구들과 술자리 등에서 공안당국에 꼬투리 잡힐 만한 얘기를 한 적은 없나?
“술 한잔 먹으면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끔 토론했다. 그러나 나나 이수병이나 사회주의혁명 이런 것은 불가능하니까 북유럽식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북한 관계는 서로 화해해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김종대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2심에서 감형된 게 징역 20년이었다.
‘박정희의 인혁당 후회’ 진심일까 의심
-이수병, 김용원 등의 사형 집행 소식은 언제 들었는가?
“유기징역 형을 받은 사람은 그때 안양교도소에 있었다. 4월9일 아마 가족 면회를 통해서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화가 나서 죽겠더라. 이강철 등 민청학련 관련자 중에서 석방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콜라와 과일을 사서 교도소에서 제사를 모셨다. 그때 내가 참 많이 울었지라.” 어느새 김종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김종대가 구속된 지 얼마 뒤 진영읍 대창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부인(차영자)한테 장학사가 찾아왔다. 그는 공산주의자 아내가 반공시범학교에 있을 수 없다면서 사표를 내거나 지리산 골짜기 학교로 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했다. 부인은 사표를 내고는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 유치원생 등 아이 셋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호텔 룸메이드 등의 일을 하면서 혼자서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박정희가 죽은 뒤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지냈나?
“친구가 하는 박스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일본책 번역을 하면서 살았다.”
-재심 법정에서 박정희가 술만 먹으면 인혁당 사형을 후회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출처는 어딘가?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석방운동을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1982년 출소한 직후 그의 집을 찾아갔다. 윤 전 대통령은 박정희 측근한테 들었다면서 박정희가 말년에 술만 먹으면 인혁당 8명을 사형시킨 것을 후회하면서 울었다는 말을 했다. 그 측근이 누군지는 얘기하지 않더라. 하지만 나는 박정희가 그런 일말의 양심이 있었을까 싶다.”
그는 지난겨울 20여차례의 촛불시위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민주주의는 독재자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싸워야 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이죠.”
※42주기 인혁당 추모제가 대구(8일 오전 11시 칠곡현대공원)와 서울(9일 오후 3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1972년 여름 삼락일본어학원 시절 북한산성 계곡에서 함께한 이수병(오른쪽·1975년 처형당함)과 김종대씨. 이들은 부산사범학교 학생 시절 ‘암장’ 등 부산지역 독서 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일찍부터 사회 비판 의식에 눈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5년 4월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