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녀자-탄생과 굴절의 70년사
박영자 지음/앨피·2만8000원
“아직도 우리의 녀성들은 남자들과 같이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도 많은 시간을 가정일에 바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그들은 사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로력적 부담을 걸머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녀성들을 가정일에서 해방하고 혁명과 건설에서 그들의 역할을 더욱 높이기 위한 기술혁명에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1970년 11월2일 조선로동당 5차 대회, <김일성 저작집> 가운데)
해방 후 북한은 소련군의 영향력 아래에서 식민체제 종식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한다. 김일성 정권은 민족국가 건설과 여성해방 논리를 연계하여 여성을 ‘민족주의 국가건설의 주체’로 재구성한다.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고, 남녀평등 정책을 내놓으며 전근대적 여성상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인민을 선동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혁신적 노동자’와 ‘혁명적 어머니’로서 여성을 이중착취하는 시스템이 깔려있다.
<북한 녀자>는 북한이 펼쳐온 성 정치학을 해부한 ‘북한 젠더사’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인 저자는 연구자로 탈북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강한 자기 주장과 억척스러운 생활력, 반대로 가정이나 국가 앞에서는 순종적인 두 가지 태도에 놀랐다”고 말한다. 해방 후 북한이 여성을 노동자와 어머니로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다. 저자는 능동적인 ‘억척’과 수동적인 ‘순종’을 함께 지닌 북한 여성들의 삶과 정권의 양성평등정책 굴절을 여러 단계로 나눠 분석했다.
북한에서는 전후 복구와 산업화 시기에 이른바 대대적인 ‘노력동원’이 진행되었다. 사진은 여맹이 주도한 노력동원 모습. <조선녀성> 1979년 2월호. 앨피 제공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 정권은 자립경제에 기초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산업화를 주도한다. 공장과 각 대중조직에서는 애국적 결의와 충성이 모든 활동의 핵심 구호가 된다. 이때 생산 활동과 애국적 충정을 강제하는 여성의 노동계급화와 혁명화가 함께 진행된다. 바로 ‘혁신적 노동자’와 ‘혁명적 어머니’라는 이중역할 모델의 탄생이다. 저자는 이때 “양성평등 정책이 1단계 굴절”했다고 본다.
당시 북한 정권은 여성들을 “사회주의 기초 건설의 믿음직한 역군”이라 추켜세우며 기혼 여성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보육시설과 세탁소를 만들었다. 각 지역엔 밥 공장과 반찬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혁신적 노동자’를 만들려고 작업장에선 작업비판회 강화, ‘모범 따라배우기 운동’을 펼쳤다.
1974년, 경제난 속에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절대권력의 부자세습이 이뤄진다. 체제를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북 정권은 여성에게 ‘가정의 혁명화’를 강제하고 ‘혁명가를 양성하는 아내’로서 역할을 강조한다. 남편과 아들에게 헌신하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이 여성들이 따라야 할 롤모델로 제시됐다. 국가 산업의 중심인 중공업에 남성을, 그 외 농업과 경공업에 여성을 배치하면서 산업 위계가 성별 위계로 구조화되었던 때다. ‘남녀평등’을 외쳤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올라가지 않는 “양성평등 정책이 두 번째 굴절”된 시기다.
경제가 어렵고 체제가 불안할수록 ‘혁명적 어머니’는 강조됐다. 혁명적 어머니에게 필요한 각종 규범을 여성들에게 내면화하는 역할은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이 맡았다. “양육은 미래의 노동자이자 혁명가를 양성하는 국가사업이고, 학교와 가정은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 공간이며, 교육과 양육은 여성의 주요한 역할”이 됐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육아와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수령’에 대한 절대충성을 실현하도록 강조되었고, 이것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북한의 특수성이라고 말한다.
1970년대 후반 당시 안주견직공장과 평양시 중구피복공장의 ‘공장대학생’ 및 여성 노동자들의 생활총화 모습. 북한 정권은 각계각층에 조직을 만들어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학습시켰다. 앨피 제공
1995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선군정치’ 이후 여성들의 경제적 부담은 더 커졌고, 여성들은 변화의 길로 나섰다. 시장화와 각종 정보의 유입으로 자유와 실용주의 사고가 생겨나면서 자립심이 커졌다. 고질적인 가부장적 규범이 해체되는 양상도 드러났다. 생존문제 때문에 벌어진 출산 기피 현상이 가족해체와 가치관 변화로 이어지면서 여성이 주도하는 이혼도 늘었다.
거듭된 경제난 이후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집단주의가 약해지자 당국도 위기를 느끼고 여성들을 달랬다. <여성권리보장법>(2010)을 만들어 여성에 대한 차별금지와 여성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을 공표한 것이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했다. “녀성은 자녀를 낳거나 낳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밝힌 동시에 “국가적으로 녀성이 자식을 많이 낳아 키우는 것을 장려한다”고 명시해 그동안 일관되게 추진해온 ‘국가=사회주의 대가정’이라는 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이어진 3대 세습에서도 북한의 전통적 젠더 전략은 고수됐다.
저자는 분단 70년을 맞은 현재 북한 젠더 시스템의 3대 행위자가 “전진하는 여성, 전통적 젠더 프레임을 보수하는 정권, 무기력한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중 여성과 남성은 변화하는 중이나 정권만이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