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가 8일 여성의날을 맞아 서울 은평구 신도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이 학교 이진현 교사가 전한 보라색 꽃을 전하고 있다. 방준호 기자
“여성의 날이니까 오늘만큼은 우리 여성들이 잠깐은 행복할 권리가 있지 않겠니?”
영상 속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솟았다. 8일 여느 평범한 날처럼 서울의 한 백화점 지하 여성의류 매장에서 옷을 팔고 있던 워킹맘 김선미(41)씨에게 보라색 장미 꽃다발과 영상편지가 배달됐다. 언니 김선영(43)씨가 보낸 것이다. “네가 워킹맘이 돼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 보니까 짠하고 그러네. 네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 이민준군은 엄마에게 꽃미소를 날리고 있어.”
아들과 언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며 선미씨는 “일하는 여성으로 살면서 아이에게도, 집에서 아이를 대신 맡아 키워주는 언니에게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자꾸 눈물이 나는 것 같다”며 연신 눈가를 훔쳤다. 이날도 선미씨는 감기 걸린 민준군을 언니에게 맡기고 출근했다. 옷 진열장 위에 꽃을 놓아두고 선미씨는 다시 바쁘게 손님을 맞았다.
김선미씨가 자신이 일하고 있던 서울 한 백화점에서 언니 김선영씨가 한국여성의전화를 통해 보낸 장미 꽃다발을 받고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제공
8일 한국여성의전화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꽃을 전하고 싶은 여성들에게 보라색 비누 장미꽃을 대신 배달해주는 ‘배달의 장미’ 이벤트를 열었다. 언니가 동생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109년 전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여성해방을 외치며 들었던 장미꽃을 전했다. ‘빵은 여성의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의미합니다. 남편·애인 등에 살해당한 여성 1.9일에 1명, 성별 임금 격차 오이시디(OECD) 국가 중 1위. 참된 정치의 의미가 상실된 오늘, 여전히 유효한 외침을 담아 장미를 드린다’는 문구가 꽃봉오리에 달렸다.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차별 속에서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내는 여성들이 오늘만큼은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이벤트의 의미를 설명했다.
서울 신촌 길거리에서 동료 활동가 김미현씨가 보낸 꽃을 받아든 여성주의 모임 불꽃페미액션 이가현(25)·김세정(24)씨도 “아 너무 행복해”를 외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이가현씨는 “지난 1년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활동’, ‘천하제일겨털대회’ 등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에 나서며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했다. 활동할 때마다 불거지는 신상털이와 폭언 등 각종 여성혐오에 맞서면서 페미니즘을 한국사회 굵직한 화두로 만들어 낸 시간이었다.
이씨는 “우리가 서로한테 참 좋은 친구고, 동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받은 꽃 몇 개를 빼내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다시 건넸다. “오늘 여성의 날이라서요.” 당황하던 여성들도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성주의 모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이가현 김세정씨가 8일 동료 활동가 김미현씨가 보낸 장미꽃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방준호 기자
서울 은평구 신도고등학교 1학년 2반 학생 27명도 이날 아침 이번 학기 첫 ‘진로와 직업’ 수업 시간에 뜻밖의 보라색 꽃을 받아들었다. 이 수업을 담당하는 이진현 교사가 준비한 선물이다. “우와”, “이거 비누 꽃이에요?”라고 탄성을 지르던 아이들에게 이진현 교사가 설명했다. “여성의 날이라고 해서 3월8일이면 전 세계에서 행사를 해. 선생님은 백수 시절에 여성의전화에서 여성들과 상담을 했는데, 많은 것을 여성들과 이야기하며 배웠어.” 수업을 마치고 나온 이진현 교사는 “우리 아이들, 특히 여학생들이 이 짧은 순간을 기억하면서 학교에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침해됐을 때 당당하게 맞섰으면 좋겠다”고 꽃을 전한 이유를 설명했다.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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