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과 관련한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에 최씨가 들어서고 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출석하지 않았다. 이 법정은 1996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12·12 및 5·18 사건으로 피고인석에 나란히 섰던 곳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구중궁궐 청와대 관저에서 탄핵심판과 특검수사를 기다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시간을 때울 영화를 추천한다면 아마도 ‘놈놈놈’(<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2008)이 아닐까 싶다. 박 대통령 당선 4주년인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최순실씨,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첫 공판에서 나온 각각의 진술은, 박 대통령에게 좋거나 나쁘거나 그저그런 내용들이었다. 반면 큰 틀에서 보면 박 대통령에게 ‘나쁘지 않은 구도’라는 평가도 나온다. ‘박-최-안 3각 공조설’부터 ‘각자도생설’ 등의 진위를 대차대조표로 따져봤다.
최순실-박근혜
“공소사실을 전부 인정할 수 없다. 박 대통령과 안 전 수석과 공모한 사실이 없다.”
최씨는 774억원에 이르는 미르·케이(K)스포츠재단 기금 모금 과정에서 기업들을 겁박해 돈을 뜯어냈다는 직권남용과 강요 혐의 등을 모두 부인했다. 형법의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할 때 적용된다. 최씨는 공무원이 아니다. 이때문에 검찰은 공직자인 안 전 수석과 박 대통령에게 직권남용 혐의를 두면서, 최씨를 두 사람의 공범으로 묶어 기소했다.
문제는 최씨와 안 전 수석 모두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검찰 역시 의심은 하면서도 구체적인 접촉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안 전 수석은 수첩 17권 510쪽 분량에 박 대통령의 직권남용 증거를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최씨와 안 전 수석을 연결하는 다리에 박 대통령을 넣어야 직권남용 혐의가 완성되는 구조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최씨의 전면 부정은 검찰 판단에 기초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 구도를 돌파할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정호성-박근혜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에 대해 자백하는 취지다. 대통령 뜻을 받들어서 했다. 공소사실을 전체적으로 인정한다.”
문고리 3인방 중 한명인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은 첫 공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시원하게 인정했다. 특히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며 ‘공모 관계’까지 진술했다. 검찰 관계자는 “정 전 비서관의 법정 진술만으로도 당장 내일 헌재가 탄핵심판을 한다면 탄핵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호성, 너마저’라는 말이 나올 법한 자백이다.
정 전 비서관으로서는 최씨 소유로 검찰이 확인한 태블릿피시, 자신과 최씨가 공유하며 연설문과 국가 기밀문건 등을 주고받은 지메일 계정 등 빼도박도 못하는 물증이 넘쳐난다. 공무상 비밀누설죄의 형량은 최대 징역 2년이다. 최씨처럼 모든 혐의를 부인해야 할 만큼 중형은 아니어서 굳이 재판부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가 없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진술이다. 헌법적으로는 탄핵이 가능한 사유지만, 형사처벌의 경우 전망은 갈린다.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낸 탄핵심판 답변서에서 “청와대 참모들이 나의 발언 취지를 오해해 과도한 직무집행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특히 “문건들은 내 지시에 따라 최순실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다. 구체적 유출 경로를 알지 못한다”고 거듭 부인했다. ‘최순실에게 자문을 구해보라고 정호성에게 지시했지, 문건을 주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최씨를 두고 ‘키친 캐비닛’(미국 대통령이 식사에 초대해 의견을 듣는 사적 고문단)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빠져 나갈 구멍’을 더 넓혀 보겠다는 취지라는 해석이다.
안종범-박근혜
“대통령의 얘기를 듣고 전경련에 전달하는 차원에서 말했을 뿐이다. 대통령이 직접 재단 이사와 임원직 명단까지 알려줬다. 박 대통령 및 최순실과 공모하지 않았다.”
안종범 전 수석은 “대통령 지시를 전달했을 뿐 범행을 공모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나는 죄가 없으며, 검찰이 보는 혐의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물어야 한다’는 취지다. ‘왕수석’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관저에서 나오지 않는 박 대통령과의 대면보고도 못하는 신세였던 그는, 박 대통령의 전화지시를 수첩에 받아적느라 바빴다.
이런 안 전 수석은 변호인을 통해 “비선실세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확인까지 했다”며 자신의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정호성에게 ‘비선실세가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정호성이 ‘절대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믿고 대통령의 방침을 따랐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안 전 수석의 ‘치고 빠지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검찰 관계자는 “안 전 수석의 진술은 대통령을 물고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죄질은 낮추는 이점이 있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최순실처럼 자신과의 관계도 아예 끊어주면 좋은데 실망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삼각공조 또는 각자도생 또는 ‘오해하지 말아요’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과 안 전 수석과의 공모 관계를 끊어내고, 다시 안 전 수석이 박 대통령과 최씨와의 공모 관계를 끊어낸 뒤, 박 대통령은 ‘최순실의 은밀한 전횡과 안종범의 과잉 충성’을 주장하며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혐의와 물증이 서로 얽혀있는 이들 세 사람이 정교한 ‘공조 변론’을 통해 자신은 물론 박 대통령까지 구해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검찰과 법원 안팎의 의견이다.
하지만 ‘유사 가족’ 수준으로 얽혀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던 이들의 끈끈한 관계가 처벌이 두려워 하루아침에 싹둑 정리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영화 <놈놈놈>에서는 산타 에스메랄다의 노래 ‘돈 렛 미 비 미스언더스투드’(Don't let me be misundertood)가 배경으로 깔린다. ‘제발 날 오해하지 말아요.’ 40년 지기로 대한민국을 ‘공동운영’한 최순실, 20년 가까이 대통령을 모신 정호성, 2007년 대통령 경제 과외교사에서 ‘청와대 왕수석’까지 오른 안종범. 이들이 ‘제발 날 오해하지 말라’며 구중궁궐에 유폐된 ‘공주’를 향해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노래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