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수록 커지고 단단해진다
‘박근혜 퇴진’ 촛불은 지난달 29일 서울 청계광장에 처음 켜졌다. 첫 촛불집회는 서울 3만명에서 한 주 뒤인 11월5일엔 30만명으로 10배로 늘었다. 12일엔 106만명이 참가해 19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19일엔 전국 70여곳에서 96만명이 참가한 동시다발 집회가 열렸고, 지난 주말엔 사상 최대인 190만명이 전국 50여곳에서 촛불을 들었다. 지금까지 5차례 주말 촛불집회 참가자는 주최 쪽 추산으로 연인원 423만명에 이른다. 성난 촛불 행렬은 ‘청와대 200m’까지 다다랐다. 평화적 집회에 대한 경찰의 일방적 금지통보를 법원이 잇따라 기각하면서, 집회 구역과 행진 범위가 갈수록 넓어졌다. 지난 주말 오후엔 수만명이 청와대에서 200m 떨어진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까지 진출했다.
시민들의 ‘결기’는 더 단단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버티기가 계속되자 지난 주말 진눈깨비와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또다시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이 켜졌다. 대구에서 온 강아무개(61)씨는 “대통령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고, 손자 세대가 훗날 멋진 나라를 만드는 데 기초를 다지기 위해 상경했다”며 “대통령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 올라와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온 남궁명화(46)씨는 “눈이 오니까 더 좋다. 뭔가 결과를 향해 가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 지치지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하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2. 평화의 힘이 세다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사고나 충돌은 거의 없었다. 외신은 “10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음에도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뤄졌다”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지난 26일 5차 촛불집회 때 경찰에 연행된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연행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12일 집회였다. 당시 처음으로 거리행진이 허용된 경복궁 앞 내자교차로에서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경찰 8명, 시위대 55명이 부상했다. 경찰버스 위에 올라간 시위대 23명이 한때 연행됐지만 곧 풀려났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경찰이 불법시위 행위자로 3609명을 무더기 입건한 것과 대조되는 수치다.
이번 집회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 기조가 강력하다.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을 시민들 스스로 막아서고 있다. 시민들은 의경을 안아주거나 꽃을 건네고, 집회가 끝나면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를 자발적으로 떼어내는 이들도 있다. 경찰 역시 집회 참가자들을 자극하는 경고방송 대신 “나라를 걱정하는 만큼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달라”(10월29일 집회)며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강경하게 시민들을 밀어붙이거나 대규모로 연행에 나서는 작전은 없었다. 시민들도 경찰도 강경진압과 폭력시위의 악순환을 우려하지 않는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차 범국민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등에 태운 고래를 형상화한 대형 풍선이 들어오고 있다. 서울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만든 것이다. 김명진 기자 llittleprince@hani.co.kr
3. 10·20세대들이 나선다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활약이 빛났다. 시민들 사이에선 투철한 민주주의 의식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10대, 20대에 거는 기대가 높아졌다. 청와대 문서 유출 의혹이 보도된 지난달 26일 이후부터 각 대학에선 강도 높은 시국선언이 쏟아졌다. 지난달 26일 서강대와 이화여대 등을 시작으로 모두 141개 대학에서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대학생들의 이런 움직임은 각계각층의 성명과 시국선언의 마중물이 됐다. 중고생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지난 17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엔 고3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등 중고생들은 삼삼오오 깃발을 만들어 집회에 나왔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을 막아서는 것도 이들이 앞장섰다. 지난 26일 집회에서 자유발언을 한 고3 최연서양은 “그동안 수능과 논술이란 장막 뒤에 숨은 채 늦게 나온 것이 죄송하다”며 “가족들이 모여서 오순도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게 국민들의 평범한 바람 아닌가. 대통령이 국민들 마음을 이렇게 찢어지게 해놓고 어떻게 자리를 지키고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김현종 메디치출판사 대표는 “집회에 나온 청소년, 대학생들은 ‘뼛속까지 민주주의’다. 한국은 웬만해선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 10·20세대 수백만명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4. 차이의 정치를 인식하다
광장에선 다름과 차이에 대한 공존과 협상이 가능한 ‘차이의 정치’가 차츰 싹을 틔우고 있다.
26일 광화문 촛불 집회에는 애초 남성 힙합그룹 디제이 디오씨가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이 그룹의 신곡 ‘수취인 분명’의 가사에 대한 여성 혐오 논란으로 25일 출연이 취소됐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혐오를 안 하면 힙합을 못 하느냐”며 주최 쪽에 항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소셜네트워크(SNS)에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적어도 주최 쪽이 유명 연예인 공연을 큰 부담을 무릅쓰고 하루 전에 취소할 수 있었던 것은 차이의 정치, 광장 민주주의의 과정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집회 현장 무대에서는 여성 혐오나 소수자 비하 표현을 하지 말 것을 사전에 당부하고 있고, 그런 발언이 나올 경우 주최 쪽이 마이크를 끄기도 한다. 이날 저녁 통인시장 근처 시민발언대에서 한 시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가리켜 여성 비하적인 욕설을 하자, 지켜보던 시민들 사이에서 “꼭 저런 말을 써야 하느냐”는 지적이 오가기도 했다.
5. 퇴진이 끝은 아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8음절 구호와 팻말은 미래를 향한 바람으로 진화하고 있다. 애초 ‘최순실 국정농단’ 규탄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는 ‘박근혜 퇴진’을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촛불의 대표 구호는 여전히 “박근혜 퇴진”이지만, 집회 연단에서는 “재벌도 공범이다” “세월호를 살려내라” “국정화를 폐기하라” “위안부 합의 폐기하라” 등 다양한 내용의 구호와 자유발언이 쏟아졌다. 지난주말 자유발언에 나선 대학생 김아무개(22·여)씨는 “최순실 사태는 우리 사회의 정경유착이 여전하다는 명백한 증거”라며 “대통령 퇴진보다 더 중요한 게 이런 부패 관행을 뿌리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 이민주(56)씨는 “솔직히 그동안 세금 많이 냈는데, 그걸로 복지 제대로 하면 안 아까울 거야. 그런데 1% 소수를 위해 쓰여. 그러면 안 돼. 국가 시스템을 제대로 바꿔야 해”라고 말했다. 중3 김해연(16)군은 “제일 화가 난 것은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다. 자기들은 편한 데서 좋은 거 먹으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신했다. 너무 참을 수 없다”고 말했고, 고1 권순범(16)군은 “아버지가 코레일 다니시는데 성과연봉제 때문에 두달 동안 파업을 하고 계신다. 평범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 것 빼앗아서 가진 사람들만 배불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이 나라가 잘못됐다고 느낀다”고 했다.
김지훈 안영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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