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940일째인 10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의 모습.
“이 곳에 오면 항상 추워요.”
10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 참사 940일째. 안산 단원고 희생자 윤민이 엄마 박혜영(53)씨는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었다. 이곳은 박씨가 2년 넘게 내 집 드나들듯 하는 곳이다. 진상규명을 위해 유가족들이 목소리를 내는 곳이다. 시민들이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고, 공허한 마음을 서로 위로하는 곳이다. 세월호 광장이 조성된 이후 광화문에선 각종 기자회견이 더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이날도 정부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문화예술인, 전국국공립대학교 교수들, 5대 종단 종교인 등이 각각 시국선언과 정부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줄줄이 열었다.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서명을 받는 서명대인 ‘진실마중대’, 노란리본공작소, 분향소 등의 천막이 펼쳐진 세월호 광장을 관리하는 김용택 4·16연대 광화문광장 상황실장은 “이제 이곳은 다양한 시민사회 계층들이 목소리를 내는 장소가 됐다”고 말했다.
세월호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다양하지만, 이들의 외침은 최근 하나로 모아졌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대통령은 하야하라”다. 세월호 광장은 부실한 사고 대응을 넘어서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과 박 대통령의 비정상적 국정 운영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통령의 7시간’ 의혹이 짙어지면서 더 관심을 받고 있다. 20만명이 모인 지난 5일 촛불집회 때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무료 배포하는 노란리본 4만개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진상규명 촉구 서명지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서명지에는 하루 평균 600여명이 참여했던 것과 달리 1만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분향소 역시 분향객들이 줄을 이어 평소보다 2시간 늦은 밤 11시가 다 돼서야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마련된 노란리본공작소.
■ 12일 촛불집회에 필요한 노란리본은 10만개…분주해진 세월호 광장
10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 노란리본공작소에서는 12일 주말 집회에서 배포할 노란리본 10만개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100만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12일 촛불집회를 앞두고 이곳은 더 분주해졌다. 특히 노란리본공작소는 비상이 걸렸다. 12일 3차 촛불집회에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노란리본 수는 대략 10만개. 평소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문을 열고 시민들의 참여로 리본을 만드는데, 시간당 10명 안팎이 참여한다. 그렇게 하루 꼬박 만들면 최대 1만개가 만들어진다. 촛불집회를 이틀 앞둔 이날 오전 11시쯤 찾은 리본공작소는 “1인당 1만개씩 못 만들면 자리에서 못 일어나”라는 농담이 나올 만큼 분주했다.
리본공작소가 생겼을 때부터 2년 넘게 리본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역사강사 윤혜진(46)씨는 공작소 문을 여는 낯선 이들이 보일 때마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세월호 참사에 분노했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리본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남 거제에서 서울로 이사 온 3개월 전부터는 거의 매일 리본공작소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광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목격했어요. 특히 유가족들이 삭발하던 날,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위원들과 조사관들이 특조위 해체를 막아보려 단식농성을 하다 끝내 천막을 접을 때 펑펑 울었던 게 생각나요.”
노란리본 제작은 A3용지 크기의 노란색 리본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재단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길게 잘라내 국수같이 늘어진 천을 ‘칼국수’라고 부른다. 이걸 다시 리본 한 개 길이로 잘라내면 ‘단무지’, 리본 모양으로 꼬으면 ‘팝콘’이라 부르고, 팝콘에 군번줄을 달면 완성이다. 처음 방문하는 이들이 하는 작업도 팝콘에 군번줄 달기다.
일주일에 서너번 점심시간 때마다 동료들 모르게 이곳을 찾아 리본을 만든다는 광화문 직장인 이아무개씨는 빵을 사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고1인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40대 주부 3명도 이날 공작소를 찾아 일손을 거들었다. 최은영(44)씨는 “우리 딸과 세월호 아이들이 또래잖아요. 애가 고등학생이 되니 엄마랑 친구가 돼요. 진짜 이 나이의 아이들이 의지가 되고 너무 예쁜데 그런 아이들을 잃었으니…”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1과 고3인 딸 둘을 뒀다는 이동수(44)씨도 지난 6일부터 매일 리본공작소에 나오고 있다. 노후대책을 세워둔 뒤 사업에서 은퇴했다는 그는 “세월호와 국정원의 연계 이야기가 나올 때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뭐라도 하려고 세월호 관련 집회가 있을 때마다 나왔다. 지금은 리본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다”고 말했다.
■ “세월호는 국가살인”…‘박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
2년이 넘게 흘렀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아직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 세월호특별법과 특조위가 만들어졌으나 특조위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해보지 못하고 지난 9월 해체됐다. 특조위 활동기간에 관한 소모적인 논쟁을 마무리하고 특조위에 세월호 인양 뒤 조사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은 세월호특별법 개정안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해 폐기됐다. 열흘 전까지도 연내 세월호 인양이 가능하다고 약속했던 정부는 11일 “올해 인양은 어렵다”고 공식 선언했다. 유가족들은 삭발과 단식, 도보순례 등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가며 ‘진상규명’ 하나를 요구했지만, 다시 2014년 4월로 돌아간 것 같은 상실감을 떨치지 못한다.
김용택 상황실장은 “세월호 자체가 증거인데 이 정권이 온전한 인양을 할 리 없다. 그래서 배에 수많은 구멍도 뚫지 않았나. 내년에 인양을 하긴 하겠지만 복원할 수 없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 박혜영씨는 “해양수산부 세월호 인양추진단장이 사직했다는데 책임지지 않고 또 도망을 갔다. 이 정권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 7시간 의혹에 대해 우리가 묻는 건 재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정부와 대통령이 그 시간동안 구조 지시를 안 하고 뭐했냐는 거다. 대통령이 평소 (성형관련) 시술을 받든 말든 관심이 없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이렇게 입 다물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시민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일부러 세월호 광장을 찾아왔다는 중1 학부모 한미영(36)씨는 “세월호 문제는 내 생활 안에서 해결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 정권이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눈 뜨게 해줬다. 7시간 관련해 성형외과 얘기가 계속 나오는데 이제는 그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대통령이) 했다고 해도 믿을 판”이라고 말했다. 서명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학원강사 조철용(44)씨는 “내가 대학생일 때 우리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고 바랐는데 지금껏 그런 사회가 되질 못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이 정권이 평범한 시민들을 투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분향소에는 10~20대 젊은이들이 찾아와 분향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과 교보문고에 견학 나왔다가 세월호 광장에 잠시 들렀다는 서울의 한 중학교 2학년 박하늘(14)양은 “다시는 세월호 같은 비극적인 사고가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민중총궐기 때 친구들과 교복을 입고 참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월호 1주기 때를 시작으로 구의역 사고, 고 백남기 농민 사건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1학년 홍아무개(16)군은 “세월호는 국가 살인”이라고 말했다. 평소 세월호 광장을 자주 찾는다는 그는 리본공작소에 앉아 짜장밥을 급하게 먹고는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여하러 자리를 떴다.
10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 ‘진실마중대’에서 시민들이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및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서명을 하고 있다.
■ 12일 밤을 수놓을 낙엽처럼 붉은 촛불
밤 8시경, 비도 그치고 계속 이어지던 기자회견 마이크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들의 음악 소리마저 끝난 시간에도 리본공작소에선 10여명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누군가 청와대 앞 시위에 대해 말을 꺼냈다.
“청와대 못 가게 하면 검찰로 가야 하는 것 아냐?”
“주말이라 건물에 아무도 없을 텐데 가서 뭐해.”
“건물이라도 압박해야지.”
“하하하하.”
작별 인사를 나누고 리본공작소를 나왔다. 군번줄을 매느라 양쪽 집게손가락이 빨갛게 부어올라 아렸다. 차가운 바람을 크게 들이마시다 맞은 편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 눈길이 갔다. 김사인 시인의 ‘조용한 일’ 시구가 적혀 있었다.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 하나 즐길 수 없게 민심에 불을 지른 이는 청와대에서 숨죽인 듯 조용하다. 성난 민심은 12일 밤 낙엽처럼 붉은 촛불을 밝힐 예정이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이날 2시부터 대학로에서 세월호 광장이 있는 광화문까지 행진한다. 글·사진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10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세월호 미수습자 수습을 기원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