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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통령이 대신 고발해달라 했나요?

등록 2016-10-10 21:07수정 2016-10-11 11:47

[밥&법] 동네변호사가 간다
‘제3자가 명예훼손 고발’ 권력자 비호 악용
통영에 사는 스님 ㄱ씨는 요즈음 두어 달에 한 번씩 형사재판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온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논란이 한창이던 2013년에 트위터에 몇 개의 글을 썼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것이다. 당시 ㄱ스님은 “박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당선됐다”, “당선자 행세를 한다” 등의 내용을 트위터에 썼다. 그밖에 박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도 올렸는데, ㄱ씨는 “모두 언론기사 등에 나온 얘기를 보고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ㄱ씨가 이 모든 내용이 허위라는 걸 알면서도 대통령을 비방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판단해 ㄱ스님을 재판에 넘겼다.

ㄱ씨를 수사기관에 고발한 사람은 이 사건의 ‘피해자’인 박 대통령이 아니라 ‘활빈단’이라는 보수단체의 대표 ㄴ씨였다. ㄴ씨는 ㄱ씨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대통령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한 내용을 두고 볼 수 없어 고발했다”고 했다. ㄱ씨의 변호인인 나는 혹시나 싶어 ㄴ씨에게 “박 대통령 본인이 ㄱ씨가 쓴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한 적 있냐”고 물었다. 그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대통령이랑 내가 그런 얘길 왜 하느냐”며 도리어 역정을 냈다. ㄴ씨는 대통령 개인을 비방하는 건 그 자체로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대통령을 대신해 대통령의 명예를 부지런히 지키는 사람은 ㄴ씨만이 아니다. 보수단체 자유청년연합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한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2014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같은해 홍성담 화백은 작품에서 박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풍자했다가 보수국민연합이라는 단체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했다. 그밖에도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다가 제3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대통령을 대신해 명예훼손 고발을 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한 가지 방식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대통령을 위해 고발장을 제출하는 사람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고발당한 사람들이 수사를 받게 하는 데 있다. 일단 고발장이 접수되면 어찌됐든 수사기관은 관련자를 불러 조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경찰서와 검찰청에 불려가 몇 번 조사를 받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본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들까지 크게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들이 노리는 결과는 이런 겁주기 효과로 일단 대통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잠잠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 무혐의 처분이나 무죄판결이 나오더라도 일단 수사 대상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보니 무리한 고발이 끊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상황은 형법이 명예훼손죄를 친고죄로 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를 시작할 수 있는 친고죄와 달리, 명예훼손죄는 피해 당사자가 고소하지 않아도 수사와 재판이 진행된다.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의 진행을 멈출 수는 있지만, 특별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검찰이 피의자를 불러 조사하고,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 명예는 그야말로 개인적인 법익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피해자가 가만히 있는데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처벌을 받는 상황은 납득하기 어렵다.

유엔자유권위원회는 이미 여러 차례 우리나라에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을 폐지할 것을 권고해왔다. 명예훼손을 국가가 나서서 처벌하면 권력 감시와 비판이 위축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지적이다. 대법원 역시 “공직자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그것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쉽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악의적인 음해라면 대통령이 직접 고소를 하면 된다. 제3자의 고발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사기관에 불려가 압박을 받는 상황이 더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국회에는 명예훼손을 친고죄로 바꾸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축소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명예훼손을 친고죄로 바꾸는 일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정민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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