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시리아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온 함위 마디브가 지난 24일 인천 연수구에 있는 한국이주인권센터 활동가의 집에서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디브는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
[2016 나눔꽃 캠페인] 살기 위해 도망친 시리아 난민 마디브 가족
5년째 내전중인 알레포에서 살다
폭탄 세례에 일터·집마저 무너져
“한국은 안전” 전재산 털어 한국행
먼저온 친척 덕에 월셋집 구했지만
문화탓 옆집과 갈등 빚고 거리로
출입국지원센터 6개월 임시거처 도움
“폭탄없어 행복하지만 살곳 있었으면”
5년째 내전중인 알레포에서 살다
폭탄 세례에 일터·집마저 무너져
“한국은 안전” 전재산 털어 한국행
먼저온 친척 덕에 월셋집 구했지만
문화탓 옆집과 갈등 빚고 거리로
출입국지원센터 6개월 임시거처 도움
“폭탄없어 행복하지만 살곳 있었으면”
“엄마, 왜 우리는 이렇게 따로 떨어져서 자야 해요?”
시리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난민 신청자 함위 아이샤(31)는 며칠 전 다섯살짜리 딸 이브라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말문이 탁 막혔다. 부모에 대한 원망 없이, 그저 ‘왜 이전처럼 살지 않는 거냐’고 묻는 딸의 천진한 눈망울을 보다가 아이샤는 결국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아이샤는 지금 이브라힘과 큰아들 압둘라띠프(16)부터 태어난 지 4개월이 된 막내 마디드까지 8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에 있는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서 ‘따로 또 같이’ 살고 있다. 돈 벌러 나간 남편 함위 마디브(34)는 한국에 먼저 온 고모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고 있고, 아홉 식구는 침대 두 개, 옷장 하나, 테이블 하나가 있는 3평(9.92㎡) 남짓한 방 세칸에 나뉘어 지내고 있다. “아이들 눈에는 예전처럼 한 집에 가족들이 모여사는 게 아니니까요. 아이들이 어려서 그런지 상황을 잘 이해를 못해요.” 지난 24일, 모처럼 가족들과 만난 마디브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마디브네 열 식구는 시리아 난민이다. 지난 17일(현지시각) 포격으로 무너진 건물에서 구조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멍하니 앉아있던 외신 사진 속 그 아이, 옴란(5)이 있던 바로 그곳이 아이샤네 가족의 고향인 알레포다. 마디브 가족은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이 5년째 이어지면서 ‘지옥’이 돼버린 알레포를 등지고 ‘한국행’을 택했다.
“하루 종일 하늘에서 폭탄이 비처럼 떨어졌어요.” 시리아에서의 기억을 묻는 질문에, 마디브는 위 아래로 크게 손짓을 해대며 마을로 폭탄이 쏟아지는 풍경을 묘사했다. 내전 와중에도 그럭저럭 버티던 마디브 가족의 일상이 직접적 위협을 받기 시작한 건 2014년 겨울 내전이 격화되면서부터다. “매일 아침 8시면 운영하던 중고차 부품가게로 출근하곤 했어요. 어느날, 우연히 20분 늦게 가게에 도착했는데 가게 위로 폭탄이 떨어져 가게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있더라고요. 평소처럼 20분 일찍 왔더라면….” 마디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마디브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무너진 건물 잔해를 들추며 그의 주검을 찾고 있던 주민들은 마디브를 보고 유령이나 본 듯 깜짝 놀랐다. 이런 요행도 잠깐, 가게를 잃은 뒤 포격으로 집까지 잃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해 12월, 쏟아지던 폭탄 세례를 피해 친척집으로 피신을 간 사이, 아홉식구의 단란한 보금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어요.” 그때 마디브의 머리에 떠오른 건 ‘한국은 안전하다’는 형의 말이었다. 그의 형과 고모 가족은 시리아를 먼저 탈출해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더 고민하지도 않고 입고 있던 옷가지만 챙겨 시리아를 탈출했다. 배를 타고 터키로 갔다가 9개월 뒤에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지난해 9월에서야 목적지였던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르지만, 그저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포격에서도 안전하다는 사실에 행복했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아이샤가 엷게 웃었다.
한국에서의 첫 생활은 먼저 온 친척들을 따라 인천에서 시작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지하 셋방이 이들 가족의 첫 집이었다. 모아둔 돈은 시리아를 떠나올 때 다 써버린 탓에 그나마도 친척에게 손을 벌려 마련한 집이었다. 하지만 마디브 가족에게 쉽사리 안식이 깃들진 않았다. 서로 다른 문화 탓에 옆집 할머니와 예상치 못했던 갈등을 겪었던 탓이다. “우리는 라마단 기간에 해가 뜨면 금식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끼니를 해결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이들 말 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리면 할머니가 ‘조용히 하라’며 문을 두드려댔어요.”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늘었다.
6개월간 버티고 버티다가 쫓겨나듯 집에서 나왔다. 전기세·수도세를 포함해 3개월 넘게 월세를 내지 못한 탓에 보증금 300만원은 공중으로 사라진 상황이었다. 보증금이다 생활비다 해서 빌려 쓴 돈 660만원은 여전히 갚지도 못해, 더는 친척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거리로 내몰린 가족의 사연을 듣고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가 임시로 거처를 내준 덕분에 다행히 노숙 신세는 면한 상태다. 마디브는 현재 가족들과 떨어져 중고차 부품 판매 일을 하는 고모집에 머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탓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컨테이너 박스에 부품을 싣는 정도의 단순 노동뿐이다. 한달에 1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입을 올릴 때도 있지만, 일이 없을 때는 그마저도 어렵다. 8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만도 힘겹게 벌어들인 100만원은 금세 부서져 없어지고 만다. 그래도 아이들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어 지난 8월 중순부터 시민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7~16살된 첫째~넷째 아이들을 다문화대안학교에 보냈다. 다달이 들어가는 학비 30여만원이 마디브의 어깨에 또다른 부담으로 얹어진 것이다. 게다가 올해 4월 막내가 태어나면서 분유와 기저귀 부담까지 늘었다.
마디브 가족이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서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6개월뿐이다. 내년 2월이 오기 전에 월세방이라도 구할 수 있는 돈을 모아야 하는데, 지금 손 안에 쥐는 돈으로는 그조차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마디브 가족이 지금 원하는 단 한 가지는 가족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사는 것이다. “폭탄이 없으니 돈 없어도 행복해요. 그래도 단 한 가지, 한지붕 아래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 살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신께서 이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해주고 있지 않을까요.”
글·사진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한겨레 나눔캠페인 참여하려면…
마디브 가족을 돕고 싶다면 계좌이체(하나은행 379-910001-96504, 예금주: 세이브더칠드런)를 해주세요. 마디브 가족에게 필요한 돈은 한 가족이 모여살 집을 구하는 데 필요한 보증금 500만원과 6개월치 월세 180만원 그리고 생활비 120만원 등 모두 800만원입니다. 모금액은 모두 마디브 가족에 쓰일 예정입니다. 작은 정성이 모이면 마디브 가족이 난민 지위를 얻을 때까지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디브 가족에게 또다른 방식의 지원을 하고자 하는 분은 세이브더칠드런 (02-6900-4400)로 연락해 문의하시면 됩니다. 고한솔 기자
“아이유 되고싶던 희귀백혈병 예은이 돕자” 3611만원 정성 모여
<한겨레>와 (사)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가 함께한 ‘2016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백혈병에 걸린 이예은(가명·9)양과 가족의 사연이 소개된 뒤, 277명이 후원에 동참해 모두 3611만8494원(26일 기준)의 정성이 모였다. 백혈병소아암협회는 “당초 목표금액(2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 모금됐다.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치료비가 많이 드는 백혈병과 소아암 환우들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왔다. 성금은 모두 예은양의 치료비와 경제지원비 등으로 사용된다. 예은양에게 또다른 방식의 지원을 하고자 하는 분은 사단법인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1544-1415)로 연락해 문의하면 된다.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누리집(www.soaam.or.kr)과 배너를 클릭해도 모금에 참여할 수 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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