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정치학자인 이병진씨, 그는 2010년 이른바 ‘공안사범’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 쪽은 그때부터 오랜 기간 이씨가 외부와 주고받는 편지를 계속 검열하였다. 이씨가 출판사에 보내는 ‘기고문’을 발송 불허까지 하였다. 이씨가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하였으나 교도소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마치 교도소 쪽이 자신의 알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 인권단체의 요청으로 이씨의 편지를 받고 나는 서신검열 등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서신검열 상황은 심각하였다. 교도소 쪽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만 따져도 2013년 1월부터 2014년 9월까지 이씨가 주위에 보낸 편지 검열 건수가 198건이었다. 국내 어느 교도소의 어느 수용자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압도적이고 이례적인 수준이었다.
왜 이씨는 그렇게 많은 편지를 검열당해야 했을까. 교도소 쪽은 이씨가 공안사범이라고, 많은 수의 편지를 지속적으로 외부에 발송한다고, 재판의 억울함이나 교도소 실태를 외부에 자주 알린다고 했다. 그래서 이씨의 편지가 ‘수형자의 교화 또는 건전한 사회복귀 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몇 년 동안 수백 건의 편지를 검열하였는데 검열 결과 정작 문제있는 편지라고 인정되어 발송 불허된 편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검열을 멈추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교도소는 수신자가 언론이나 사회단체인 경우 거의 대부분 검열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씨의 부모, 형제,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검열하고 심지어 이씨가 소송과 관련하여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까지도 검열을 하였다. 교도소가 여전히 수용자의 동향파악 용도로 편지를 검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감옥에 있다는 이유로, 이런 식으로, 편지를 뜯어보아도 되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죄를 지어 사회에서 격리된 사람이 권리가 제한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일부 극소수 사람의 일이니 나와 관계없다고 관심 밖에 둘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인권’은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을 구분짓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어느 사회 인권의 척도는 ‘가장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에게 ‘인간다움’을 보장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2015년 기준 전국 수용시설에 수용된 사람이 5만5123명이다. 다른 세상에 있는 일부 사람의 일도 아니다.
수용자가 편지를 주고받을 자유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장받는 헌법상 기본권이다. 우리 법도 수용자의 편지에 대해 원칙적으로 ‘무검열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원칙은 지나치게 넓은 예외로 무력화된다. ‘교화 또는 건전한 사회복귀 등을 해칠 우려’ 같은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이유로 서신검열이 정당화되고는 한다.
교도소 쪽은 교정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서신검열의 불가피성을 강변한다. 법원도 다르지 않았다. 2년여에 걸쳐 진행된 소송은 끝내 패소했다. 심혈을 기울여 상고이유서를 제출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상고 사유가 없다’는 한 줄의 답변. 시설 내에서 예상되는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서신검열의 부당성을 세상에 알렸던 한 수용자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무능한 변호사로서 이씨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그래도 한 수용자의 노력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하며 기록을 남긴다.
송상교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