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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소상인도 중소기업도 아닌 ‘소공인’ 살길 찾았네요

등록 2016-08-02 11:34수정 2016-08-02 11:55

[밥&법] 한 문장이 바꾼 세상

“형님도 이거 깎을 수 있어?”

지난 2월 문래소공인특화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일본에 견학을 다녀온 이준연(42) 케이디(KD)시스템 대표가 일본 업체에서 받아 온 팸플릿을 보여주며 오종수(44) 삼진엔지니어링 대표에게 물었다. 한 일본 업체가 낸 팸플릿에는 고급 오토바이 튜닝 부품들이 그려져 있었다.

“깎지 왜 못 깎어?”

기술만큼은 자신있었다. 같은 달 열린 문래동 팽이 대회에서 이 대표와 오 대표가 깎은 금속 팽이는 손으로 한 번 돌린 뒤 8분간 멈추지 않고 돌았다. ‘문래동에서 못 만드는 건 어디서도 못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금속가공 기술은 자신있는 사람들이었다.

오 대표의 시원한 대답에 이 대표는 “우리도 이거 한번 해보자”고 말했다. 여기에 삼덕특수기어의 정두인(46) 대표까지 세 사람이 뭉쳤다. 문래동에서 청춘을 바쳐 기술을 갈고닦아온 이들은 각자의 실력을 모아 이탈리아 명품 오토바이 엠브이(MV)아구스타의 튜닝 부품 제작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귀금속·의류 제작·금속 가공…
소규모 기술자·제조업체들
특화 지원 힘입어 활기
고급 오토바이 튜닝 부품
협업 제작하는 젊은 사장 셋
“로켓 부품 제작도 꿈만은 아니죠”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1~4가 지역에는 1300여곳의 소규모 금속가공업체가 골목마다 빽빽이 늘어서 있다. 평균 20여년은 된 영세한 가게들은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하다. 1970년대 제조업 성장과 함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이곳은 금형기술의 메카였다. 한때 대기업 자동차나 가전제품 하청기지로 활황을 경험한 적도 있지만 생산물량 다수가 해외로 넘어간 지금은 다 옛말이다. 그랬던 문래동에 최근 활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몇몇 소공인끼리 ‘콜라보’(협업)해서 새로운 제품 생산에 도전하는 것도 새롭게 일어난 현상 중 하나다. 이는 ‘도시형소공인 지원에 관한 특별법’(약칭 소공인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준연 대표는 “전태일 열사 동생인 전순옥 의원이 소공인법을 만든 이후로 문래동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며 “이렇게 서로 협업하고 교류하는 분위기는 최근 1~2년 사이 만들어진 새로운 현상”이라고 했다.

전순옥 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발의한 소공인법은 2014년 제정돼 지난해 5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은 금속가공·의류제작·귀금속 등 19개 제조업종 중 상시근로자 10인 미만인 소공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14년 기준 소공인은 업체 31만7천여곳에서 98만9천여명이 종사하고 있다. 전체 제조업체의 80.3%, 종사자의 24%를 차지하는 산업의 모세혈관이다. 그동안 소상공인 지원 정책은 주로 ‘골목상권 보호’ 같은 소상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소공인들은 지원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소공인법 제정 이후 정부는 전국 31개 집적지를 선정해 소공인특화지원센터를 열고 경영 및 기술 교육부터 직접적인 자금 지원까지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래 집적지는 법 제정이 추진되던 2013년부터 시범사업지구로 선정돼 지원 정책이 추진돼왔다.

이준연(왼쪽부터) 케이디시스템 대표와 오종수 삼진엔지니어링 대표, 정두인 삼덕특수기어 대표가 지난 29일 정 대표의 공장에서 앞으로 개발할 오토바이 튜닝 제품 제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다.
이준연(왼쪽부터) 케이디시스템 대표와 오종수 삼진엔지니어링 대표, 정두인 삼덕특수기어 대표가 지난 29일 정 대표의 공장에서 앞으로 개발할 오토바이 튜닝 제품 제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다.

설비 노후화와 생산성 악화로 회사를 폐업 처리하려던 아버지를 설득해 가게를 물려받은 2세 소공인인 이준연 대표는 지난해 특화자금 5천만원을 지원받아 노후설비를 교체해 비용 절감과 작업공정 개선에 성공한 뒤 회사를 살릴 수 있었다. 이 대표는 “솔직히 처음에는 지원금만 타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센터에서 계획서부터 실행까지 꼼꼼히 감독하고 가이드를 해준 덕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회사를 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자금 지원도 중요하고 판로 지원도 좋지만, 소공인법으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우리 소공인들 사이의 관계”라고 말했다. 문래특화지원센터가 교육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동안 소공인들 사이의 교류와 네트워크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이 대표와 오 대표, 그리고 함께 협업을 하는 정 대표를 비롯해 함께 어울리는 소공인들은 모두 지원센터 경영교육에서 같은 조로 만난 사이다. 센터에서는 이외에도 소공인 동아리를 권장하고 협업제품 마케팅 등을 지원하고 있다.

오종수 대표는 “예전에는 다른 사람이 가게에 오면 ‘기술 훔쳐 가려는 거 아냐?’ ‘주문 가로채려는 거 아냐?’라며 경계하기 바빴는데, 지금은 서로 물어보고 도와주는 게 매우 자연스러워졌다”며 “지금 우리끼리 만나면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아이디어 얘기가 끊이질 않는다. 이 동네가 이렇게 활기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대기업에서 하청 들어오는 물량을 소화하기도 벅찼지만 생산기지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빠져나간 지금, 과거와 같은 방식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센터의 지원으로 일본 오타구의 금속가공 집적지를 답사한 이준연 대표는 “가게들이 다 허름하고 우리랑 다를 바 없었는데, 그 사람들이 보여주는 팸플릿에 로켓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몇몇 업체가 협업해서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납품한다고 하더라. 우리라고 못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일단은 수입 오토바이 튜닝 부품 제작을 하지만, 앞으로 기회가 되면 디자인, 제품 개발 쪽과도 손을 잡고 우리 브랜드를 만드는 꿈도 있다”고 말했다. 특화지원센터의 지원 아래 몇몇 업체는 협업으로 전기자전거 프레임 생산을 시작했고, 치과용 의료기기 제작 협업도 진행 중이다.

문래동과 달리 다른 곳들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업종별 특성과 산업 여건을 고려한 차별화된 지원책을 개발해야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정원기 소공인지원실장은 “아직 변화는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문래 집적지의 성공을 바탕으로 다른 센터들도 집적지별 특성에 맞는 정책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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