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행복한 세상] 창간 28돌 기획
이런 단어 쓰지 맙시다
이런 단어 쓰지 맙시다
“멀쩡해서 더 충격.”
안산 대부도 토막살인 용의자 조아무개씨의 얼굴을 공개한 <연합뉴스> 사진기사 제목이다. 이 기사의 댓글엔 “소름…그냥 일반인이잖아” “눈이 무섭게 생겼다” “사이코패스처럼 생겼는데?” 등 흉악범죄자에 대한 선입견, 외모 비하 글이 넘친다. ‘멀쩡’이란 형용사가 선정적이지도 않은데 범죄자의 사진기사에 제목으로 붙으니 편견과 혐오, 증오가 튀어오른다.
이처럼 범죄 보도가 아니더라도 언론이 각종 보도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정서를 자극하는 용어나 표현들을 관습적으로 쓰면서 인권을 침해하는 기사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와 한국기자협회가 인권 보호를 최우선에 두자며 ‘인권보도준칙’을 만든 지 5년이 됐지만 여전히 사건의 진실보다 본질을 벗어난 선정적 보도가 눈에 띈다. 이에 <한겨레>는 창간 28돌을 맞아 인권위와 함께 ‘쓰지 말아야 할 단어와 표현’ 28개를 선별했다. ‘사용해선 안 될 표현’이라고 대부분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자주 쓰이는 ‘장님’ ‘정상인’(장애인의 반대말) ‘꿀벅지’ ‘윤락’ 등의 단어가 대거 포함됐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우리는 안 쓰는 표현”이라고 자만했지만 우리말글을 사랑하는 <한겨레>마저 관습적으로 쓰고 있는 단어들이 많았다. 인권위는 “특정인을 비하하는 어감이 포함된 용어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단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사실에 근거한 적확한 단어를 쓰자는 의도로 단어를 선별했다”고 말했다.
■ 장애가 있으면 비정상?
장애인의 반대말은 ‘비장애인’이다. 그러나 포털사이트에서 뉴스 검색만 해봐도 ‘정상인’이라고 쓰는 매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장애자’는 벌써 27년 전에 ‘장애인’으로 개칭됐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장애자’나 ‘불구자’로 표기하거나 장애 여부를 정상의 범주로 가름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인권위는 ‘벙어리’ 대신 ‘언어장애인’, ‘장님’ 대신 ‘시각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 대신 ‘지적장애인’ 등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권고한다. 장애를 빗대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표현도 적절치 못하다. 특정 상태나 상황을 비유하기 위해 많이 사용하는 ‘벙어리 냉가슴’ ‘절름발이 영어’ ‘눈뜬장님’ 등의 표현도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강화하거나 장애를 비정상으로 보고 쓰는 표현이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 도 넘은 ○○녀 표현, 이제 그만
지난해 12월 <조선일보>는 구치소에서 의뢰인을 접견하는 여성 변호사를 ‘접견녀’라고 지칭하면서 법조인들의 공분을 샀다. 로스쿨생들은 “여성 변호사에 대한 심각한 인격적 모독이자 명백한 성희롱”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된장녀’처럼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녀’는 언론사가 제목 글자수를 줄인다는 편리한 이유로도 남발된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를 ‘대장내시경녀’, 차 트렁크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된 여성을 ‘트렁크녀’라고 써서 제목에 올리는 경우다. 성별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성차별적 표현도 주의해야 한다. 전문직 여성에게 성별을 불필요하게 강조한 ‘여류작가’나, 남편이 먼저 죽어 홀로 남은 여성을 말하는 ‘미망인’도 잘못된 가부장적 표현이다. 관습적으로 많이 써서 이제 보통명사처럼 느껴지는 ‘김여사’도 중년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 한남충·유족충…내면화된 혐오
인종·성별·종교 등을 혐오하는 표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표현의 자유처럼 보이지만 성소수자·이주민·여성 등 특정 인물이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합리적 이유 없이 비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래 혐오 표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근 눈에 띄는 혐오 표현은 벌레라는 의미의 ‘충’을 붙여 특정 지역이나 집단을 비하하는 것이다. ‘한남충’(한국남자벌레), ‘일베충’(보수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저장소’ 이용자), ‘유족충’(세월호 참사 유족), ‘개독교’(기독교 비하), ‘맘충’(몰지각한 엄마) 등 쓰임도 다양하다.
■ “쟤, 다문화래!”…상처받는 아이들
외국인과 이주민, 노인과 어린이, 성소수자 등을 비하하거나 부정하는 표현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불법체류자’는 ‘미등록 외국인’, ‘용병’은 ‘외국인 선수’, ‘동성연애’는 ‘동성애’라고 써야 하고, 일본인과 중국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쪽발이’ ‘쨍깨’ ‘왕서방’ 등은 쓰지 말아야 한다. 부모 한쪽이 외국인인 가정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자 ‘다문화’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지만 되레 상처가 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쟤, 다문화래!”라고 아이들을 지칭하는 것만으로 경계를 만들고 비하하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 최근 아동학대 관련 기사가 많아지면서 삼가야 할 표현도 있다. 국제아동인권호보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은 재작년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 이후 언론사들이 ‘동반자살’ ‘동반투신’ 등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자 이런 표현 사용을 중지해 달라는 의견서를 보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미성년 자녀를 살해한 뒤 부모가 자살하는 것은 아동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참혹한 사건”이라며 “동반자살이란 표현이 우리 사회에 부모가 아이 목숨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유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한겨레>도 아차차…
<한겨레> 사이트에서 28개의 단어와 표현을 쓴 기사를 찾아봤다.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을 제외하고 지난 2년부터 5월 현재까지 한겨레신문과 한겨레 온라인뉴스에 게재된 기사만 살폈다. 한겨레 기자들이 쓴 글에선 쓰지 말아야 할 단어나 표현이 7개나 사용됐다. 기고글이나 인터뷰 글에서 인용하는 형식으로 쓰인 단어나 표현은 10개나 된다. 정치부 칼럼에선 ‘벙어리 냉가슴’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연극을 소개하는 문화부 기사에선 인물관계도를 설명하며 ‘편부모’라는 단어가 그대로 쓰였다. 인터넷 기사 제목에선 ‘꿀벅지 먼로 동상’ ‘이리 쿵! 저리 쿵? 김여사님, 주차걱정 마세요’란 표현이 달리기도 했다.
심상돈 국가인권위원회 정책교육국장은 “언론은 여론 형성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공익적 측면에서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다”며 “보도 과정에서 인권을 보호하고 침해하지 않도록 어휘 선택이나 맥락을 고려한 보도의 흐름, 보도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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