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임시총회 및 살인기업 규탄대회’가 지난 4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교육관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하고 판매한 기업들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검찰에 의견서 제출
“가습기 살균제 쓴 사람 폐질환 가능성 47.27배”
“가습기 살균제 쓴 사람 폐질환 가능성 47.27배”
국내 역학 전문가들이 가습기 살균제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 사이의 인과 관계가 “매우 높다”며, 바이러스 감염이나 황사와 꽃가루 등 현재까지 언급된 다른 요인들이 폐질환의 원인일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한국역학회는 2011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학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들이 보이는 증상이 오로지 가습기 살균제 노출 때만 나타나는 ‘고유질환(signature disease)’인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담아 검찰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역학회는 지난달 11일 서울중앙지검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질환에 대한 역학조사’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3일 밝혔다. 국내 역학 전문가들이 작성해 검찰에 전달한 이번 의견서는 이해 관계가 없는 전문가들이 가습기 살균제 외에 폐질환의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1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원한 산모 4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으로 사망하자, 질병관리본부는 그해 8월 역학조사를 실시해 폐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옥시레킷벤키저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들은 최근까지 바이러스는 물론 황사와 꽃가루 등이 다른 원인이 유발한 폐질환일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해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무력화하려고 노력해왔다.
검찰은 역학회에 ‘환자 정의’의 적정성부터 ‘역학적 인과관계 신뢰도’ 등을 포함해 모두 38개 질문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역학회가 검찰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가습기 살균제를 쓴 사람이 쓰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원인 미상 폐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47.27배나 높게 나타났다. 역학회는 “(이는)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의 관련성 강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가습기 살균제와 원인미상 폐질환 발생 간의 인과관계를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라고 밝혔다. 의견서를 작성한 위원 5명 가운데 1명인 황승식 인하대 교수(사회의학교실)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원인미상의 폐질환’이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 폐질환’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인과관계가 나타났다”라고 설명했다.
역학회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서 나타난 폐질환이 ‘석면증’과 같은 ‘고유질환’에 해당한다는 의견도 냈다. 고유질환이란 오로지 특정한 한 요인에 노출됐을 때만 발생 가능한 질환을 뜻하는 것으로, 역학적 인과성이 매우 높은 질환을 통칭한다는 게 역학회 쪽의 설명이다. 역학회는 “해당 역학조사에서 원인미상 폐질환으로 진단된 18명 중 17명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됐고, 지금까지 확인된 적이 없는 특징적인 임상적 및 병리적 소견을 보였다”며 “(가습기 살균제) 판매 중지 이후 원인미상 폐질환이 발생한 적이 없으므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고유 질환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역학회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한테 발생한 폐질환이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감염’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역학회는 “해당 역학조사에서 호흡기 검체, 세포배양 등 임상적으로 가능한 모든 검사를 실시한 결과, 바이러스 또는 세균 감염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사망자들이 폐질환이 봄철에 발병했다는 것을 근거로 일각에선 바이러스성 폐렴일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는데, “(폐질환의)주 발생시기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성 폐렴의 발병 정점(12~1월)보다 2~3개월 지난 후”라며 “(제기된 의혹과는)반대로 인플루엔자 유행을 염려해 가습기 살균제 사용을 늘린 게, 일정시간 경과 후 폐 손상을 유발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양상”이라고 덧붙였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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