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가운데)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 개입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이 열린 지난해 7월1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 들어와 자리에 앉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항소심을 파기환송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보수 질주/양승태 대법원 4년] (상) 브레이크 없는 역주행
출범 5년째를 맞는 ‘양승태 대법원’을 향한 여론의 시선이 곱지 않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사법부 본연의 사명을 외면하고 정치·경제 권력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임 대법원장 시절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치욕스런 과거를 반성했던 것을 부정하는 듯한 판결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국가기관의 범죄에는 애써 눈을 감아 인권의 보루가 아닌 ‘정권 수호기관’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더할 나위 없이 추락했다. 지난해 8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사법제도 신뢰도가 27%(2013년 기준)로 조사 대상 42개국 중 밑에서 4번째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사법제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국보다 신뢰도가 낮은 나라는 콜롬비아와 칠레, 우크라이나 등 부패와 범죄가 만연한 나라들이다. 2014년 7월 아산정책연구원이 실시한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도 사법부는 10점 만점에 3.69점을 기록해 11개 기관 가운데 10위에 머물렀다. 과거사 반성과 국민참여재판(배심제) 등 과감한 제도 개선으로 한때나마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민의 사법부’와는 거리가 먼 양승태 대법원의 지난 4년을 돌아봤다.
‘양승태 대법원’ 논란 판결
쌍용차·KTX해고 판결서 빈말 드러나
모두 1·2심 판결 뒤집고 사쪽 손들어줘
시민권리 위한 전원합의 판결 8%뿐 ■ 과거사 반성 뒤집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2005년 9월 취임식에서 사법부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대법원은 이후 재심을 통해 과거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이런 ‘과거사 반성’을 뒤집는 듯한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3월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20일간 구금된 최아무개씨에게 200만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내린 원심을 깼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행위이므로 국민 개개인에게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였다. 이는 2010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대통령의 통치행위라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며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단한 판결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긴급조치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긴급조치 발동이 대통령의 불법행위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곧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적 모순을 비판하는 하급심 판결도 잇따랐다. 지난달 초 광주지법 민사합의13부는 “이제 와서 새삼 긴급조치가 위헌임을 부인하는 것은 대법원 위헌 결정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대법원을 작심하고 비판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도 지난해 9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은 송아무개씨에게 “국가는 1억원을 배상하라”며 대법원에 반기를 들었다. 앞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고 홍종민 <동아일보> 해직기자의 부인 조아무개씨가 낸 형사보상 청구를 받아들이면서도,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도 국가배상을 받으려면 고문과 같은 위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돼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폈다. 대법원의 ‘과거사 뒤집기’ 판결 대상이 주로 박정희 정권 때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최고법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고법 부장 출신 변호사는 “마치 전임 대법원장의 과거사 반성이 잘못됐다는 듯 과거사 관련 판결은 모조리 뒤집고 있다”고 말했다. 5년전 “긴급조치 위헌” 결정 뒤집어
‘대선 댓글’ 원세훈 무죄취지 판결
법원 안팎 “대통령 심기 살폈다” 뒷말
정권 수호 기관으로 전락 지적 ■ 인권의 보루인가, 정권의 보루인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7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의 주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을 대법관 전원일치로 파기했다. 겉으로는 유무죄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증거능력만 문제 삼았지만, 선거법 유죄 판단의 주요 근거였던 원 전 원장의 지시 사항이 담긴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함으로써 사실상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대법관 전원일치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에 대해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일반적으로 대법관 4명으로 이뤄진 소부에서 이견이 있을 때 사건을 전원합의체(전합)로 넘긴다. 이견이 없더라도 의미있는 판례나 중대한 사건일 경우 전합에 넘기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전합에서 전원일치 판단이라면 이미 소부에서 이견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굳이 전합으로 이 사건을 가져간 것은 정치적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법원 안팎에선 ‘대법원이 박 대통령의 심기를 살폈다’, ‘상고법원 통과를 위해 정치권의 눈치를 봤다’는 등 숱한 뒷말이 나왔다. 양승태 대법원에서 시민·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판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판결과 자살한 군인의 국가유공자 인정 판결, 부부 사이의 강간죄 성립 판결 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에는 못 미친다. 실제로 이 전 대법원장 때는 대법원 전합 판결 95건 가운데 시민과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한 것으로 평가받는 판결이 16건(16.8%)에 이른다. 반면 임기를 1년 반가량 남긴 양승태 대법원은 전합 판결 81건 가운데 시민·소수자 권리를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는 판결은 7건(8.6%)에 그치고 있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양승태 대법원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진보적으로 판단해야 할 영역에서 법의 취지를 좁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보수 정권이 임명한 대법관들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영지 김지훈 기자 yj@hani.co.kr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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