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수씨.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짬] ‘송씨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송기수씨
사후 5년뒤 82년 ‘간첩단 총책’ 둔갑
4남매 중 세명도 고문 끝에 옥살이 2007년 재심 ‘무죄’ 밝혀졌으나
이미 고인이어서 명예회복 길 없어
막내아들 송씨 가족 기금모아 상 제정 “어머니는 살아서는 월북자의 아내로 네 자식을 홀로 키워야 했고, 죽어서까지 간첩단 두목의 누명을 쓰고, 자식 셋마저 간첩이 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계십니다. ‘여간첩’ 한경희의 이름으로 이 상을 주는 것은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을,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해야 했던 수많은 ‘조작된 간첩’들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을 고문해 간첩으로 만든 자들이 여전히 이 땅에서 애국자로 행세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한씨는 77년 이미 지병으로 별세했으나 82년 안기부는 딸 기복·기성, 아들 기홍·기수씨 4남매를 모두 끌고 가 100일 넘게 고문한 끝에 ‘25년간 암약한 고정간첩단’으로 꾸며냈다. 형과 누나는 2년, 기수씨는 2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친인척들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25년’의 근거는 부친 송씨가 57년부터 수차례 남파돼 가족들을 포섭했다는 것이었다. 한씨와 송씨는 모두 청주의 양반가 출신으로 도쿄 무사시노 음악학교와 니혼대학 법학과 유학 시절 만나 41년 결혼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송씨는 한국전쟁 때 월북했고, 한씨는 홀로 4남매를 키웠다. 그런데 4·19혁명 직후인 60~61년 민주당 정권의 장관 김영선이 서울로 넘어온 송씨를 만났다고, 당국에 신고했다. 이때 송씨는 아내 한씨를 만나 시어머니 병구완을 하라며 약간의 돈을 건네주고 돌아갔는데, 25년이 지난 뒤 안기부에 의해 ‘공작금’으로 둔갑된 것이다. “사실 전 3살 때 헤어진 까닭에 아버지 얼굴도 기억에 없어요. 60년에 중학생이었으니까 두 분이 만난 것도 알 수 없었고, 77년 돌아가실 때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러니 형제들 모두 영문도 모른 채 간첩이 된 거죠.” 공안사건으로는 드물게 7차례의 재판이 거듭됐다. 유일한 증거인 자백이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것이었기에 대법원에서 두 차례나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은 ‘상급심은 하급심을 기속한다’는 법원조직법 원칙을 무시하고 이례적으로 유죄를 선고했고, 세 번째 대법원에서 열린 재재파기환송심에서 끝내 유죄로 형이 확정되고 말았다. “조사받을 때 수사관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10·26’으로 실추된 위상과 전두환의 보안사에 밀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한 건’ 만들어내야 한다고들 하더라고요.” 또다시 25년이 지난 2007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 재조사에서 조작으로 밝혀졌고, 2009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건 발표 때 이미 고인이어서 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재심의 대상조차 안 된답니다.” 법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인 어머니의 명예회복을 고심하던 송씨는 지난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결심했다. “어머니처럼 고혈압이 있는데, 1월1일 한겨레신문사 독자 기행팀과 백두산 해맞이를 갔다가 귀국하던 날 연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어요. 가족들이 죽은 줄 알고 데리러 왔었죠. 더 늦기 전에, 작은 규모나마 어머니의 넋을 기리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죠.” 감옥에서 영어 공부에 몰두한 송씨는 과외교사로 생계를 잇다가 90년대 온 가족이 다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되돌아왔다. 그 덕분에 영어학원을 운영 중인 자녀들도 기꺼이 뜻에 동참해주었다. 한경희상은 ‘분단의 질곡에 맞서 민족의 통일과 인권·평화·민주의 신장, 그리고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에 기여해온 개인 혹은 단체’에 줄 참이다. 송씨 가족은 해마다 1천만원의 상금과 시상에 필요한 경비를 기부하기로 했다. 10일까지 1차 추천을 받고 오는 29일 오후 7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첫 시상식을 할 예정이다. 추천은 평화박물관 누리집(peacemuseum.or.kr) 또는 전화(02-735-5811)로 문의하면 된다. “이 상과 별개로, 소방대원들을 위한 기금도 개인적으로 구상 중입니다.” 분단의 그늘에서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은 송씨는 “우리 사회 가장 음지에서 헌신하는 이들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고 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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