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만에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은 강길봉 변호사(왼쪽)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동료 변호사의 축하를 받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강길봉 변호사, 24년만에 ‘민주화 관련자’ 인정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란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저항이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 지원했다는 이유로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던 강길봉(59) 변호사. 그는 20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24년 만의 명예회복이었다. 그는 1981년 4월, 수원지법 근무 도중 판사직에서 잘렸다. 당시 판사 재임용 기사를 실은 한 일간신문은 재임용 탈락 기준이 ‘청렴도와 국가관 등’이라고 전했다. 당시 그는 34살의 팔팔한 나이였다. 76년 판사로 임용돼 법관 임기인 10년의 절반도 채우지 않았던 때였다.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법관이 하루아침에 ‘부정하고 위험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혀 버린 것이다. 그는 정작 재임용 탈락 사유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말, 그것이 전부였다. 궐기대회 나갔다고 1981년 쫓겨나
감시 미행 도청 신변위협에 고통
“하루하루 삶 자체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가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1980년 5월18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에 참석해 이기홍 변호사, 박준로 목사 등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것이 진짜 해직의 이유였다. 평범한 판사였던 그가 광주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 섰던 것은 헌정이 무너지고 무고한 시민들이 총칼 앞에 쓰러지는 현장을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매일 아침 집에서 3㎞나 떨어진 광주도청으로 걸어가 계엄군의 폭력에 항의했다. 그가 했던 ‘배후 지원’이란 고작 “군인에 맞서 살기 위해 총을 든 시민들을 폭도라는 이름 대신 시민군이라 부르자”고 한 것과, “검열 때문에 사실보도를 제대로 못하는 국내 언론 대신 외신에 광주사태를 알리자”고 했던 것뿐이었다.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한 뒤 이른바 ‘광주사태의 조사·수습’ 과정에서 그는 합수부의 내사와 감시를 받았고 계속된 계엄령 아래서 감시와 미행뿐 아니라 신변 위협까지 감수해야 했다. 서울로 올라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이후에도 고통은 계속됐다. 통화 중 녹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가 소리 없이 뚝 끊겨버리기도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돼 죽은 채로 발견되지나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해하는 세월이었다.
독재정권에 아부한 이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내가 왜 한국에, 그것도 법조계에 남았나 수천번도 더 후회를 했습니다. ‘차라리 이민가서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살걸’ 하는 후회를 했지요.” 강 변호사는 해직 이후 불안과 울분 때문에 소화불량증과 신경증을 달고 살았다. 가슴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저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해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나를 보며 가족들이 얼마나 숨죽여 울었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저 내 아픔만 생각했지요. 가족들에게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명색이 판사 출신 변호사지만 ‘위험인물’로 소문난 그에게 사건이 올 리 없었다. 못 먹고 못 입고 산 건 아니었어도 가족들을 호강시켜주지 못했다. 24년이나 변호사로 일한 그는 지금도 서울 강북의 작은 합동법률사무소 서너 평 남짓한 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그날’에 대해 강 변호사는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그때처럼 다시 광장으로 나서겠다.”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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