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성현아씨와 박지원 의원의 대법 무죄 판결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지난 18일,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대법 판결이 있었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탈세 혐의로 기소된 ‘선박왕’ 권혁(66) 시도상선 회장을 화끈하게 봐준 판결입니다.
권 회장에 대한 대법 판결은 2개였습니다. 하나는 권 회장의 조세포탈 혐의를 따지는 형사재판이고, 다른 하나는 권 회장이 세금 3051억원을 취소해달라며 낸 행정소송입니다. 형사재판을 심리한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검찰이 기소한 탈세액 2300억원 가운데 2억4400만원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2심)을 확정했습니다. 앞서 2심은 권 회장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기나 기타 부정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는 이상한 논리로 혐의 대부분을 무죄로 판단해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권 회장을 풀어줬습니다.
1심 판결은 달랐습니다. 2013년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정선재)는 권 회장의 역외탈세 행위에 대해 “성실히 납세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큰 박탈감을 주면서 국가 재정에 손실을 입히고 해외 재산 은닉으로 국민경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며 징역 4년, 벌금 2340억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이 판결은 당시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에 발맞춰 사법부가 역외탈세를 엄단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국세청은 국제 비정부기구 조세정의네트워크(TJN)가 ‘한국의 수퍼리치들이 중국(1조1890억 달러)과 러시아(7980억 달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총 7790억 달러를 해외에 숨겨두고 있다’고 폭로하자 대대적인 역외탈세 적발에 나섰고, 권 회장이 시범 케이스로 걸렸습니다. 임환수 국세청장이 당시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장으로 있으면서 권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했습니다. 한국의 ‘선박왕’으로 불리며 성공한 기업인 대접을 받던 권 회장은 하루아침에 희대의 ‘역외탈세범’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뒤 대법원은 권 회장의 명예를 슬그머니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특히 형사재판과 함께 선고된 행정소송이 압권이었습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권 회장이 낸 종합소득세 등 부과처분취소 소송에서 “세액을 다시 계산하라”며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특히 권 회장에게 부과된 세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000억원대의 가산세(신고·납부 불성실 가산세)가 잘못 부과됐다며 권 회장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앞서 1, 2심은 권 회장에게 가산세 부과는 정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권 회장이 자신과 부인 소유인 지주회사의 주식 100%를 조세피난처인 케이만 군도의 한 로펌에 명의신탁하고, 거주 목적으로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를 구입하면서 명의를 회사로 해놓는가 하면, 국내에 있는 회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비거주자로 위장하기 위해 직함을 없애고 의도적으로 급여를 받지 않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은 탈세를 목적으로 한 사기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1, 2심과 180도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권 회장의 행동은 세금을 줄이기 위한 삼일회계법인 등의 조언에 따른 것일 뿐 탈세를 위한 적극적인 사기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전문가의 조언에 따랐기 때문에 죄가 안된다는 참으로 해괴한 논리입니다. 남의 말을 듣고 한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닌가요? 1, 2심 재판부의 판단을 간단히 뒤집는 대법관들의 용기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3년을 끈 소송에서 사실상 완패한 국세청은 “파기환송심에서 잘 대응하겠다”는 의례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3년 전 권 회장에게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하며 ‘역외탈세와의 전쟁’을 운운했던 결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검찰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지난 2012년 보고서에서 1970년대부터 2010년 말까지 역외탈세 규모가 최소 21조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넘는 규모입니다. 한국은 역외탈세 규모가 870조원으로 추산됩니다. 국세청은 최근 역외탈세 차단을 3대 추진 과제로 정하고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최고 법원의 시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그칠 뿐입니다.
이춘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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