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사재 털어서라도 로스쿨 출신 변호사 뽑으려는 이유는?”

등록 2016-01-21 18:48수정 2016-01-22 09:44

황주명 충정 대표 변호사. 사진 법무법인 충정 제공
황주명 충정 대표 변호사. 사진 법무법인 충정 제공
[짬] 법무법인 충정 황주명 대표변호사
사법시험 합격하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들 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도 절반가량은 법조 직역에 취업을 못 하게 된 지 오래다. 지난 18일 수료한 사법연수원 45기 356명 가운데 군법무관 입대자를 뺀 279명 중 144명만 로펌이나 기업, 공공기관 등에 취업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 때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낸 자료를 보면 로스쿨 졸업생 10명 중 4명 정도만 법조인으로 취업한다. 이처럼 전례 없는 ‘변호사 취업 한파’는 로펌들이 채용 규모를 대폭 줄이거나 아예 채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 불황 여파로 부동산·기업 파이낸싱(금융), 인수합병 관련 사건 수임이 급감해 로펌들의 수입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국내 중견 로펌인 충정은 과감하게 로스쿨 졸업생을 대상으로 신규 채용을 진행중이다. 판사나 검사 출신이 아닌 새내기 변호사를 채용하는 이유는 뭘까. 지난 20일 황주명(77·사진) 충정 대표 변호사를 만나 이유를 들어봤다.

불황 여파로 로펌 수입 급감 불구
‘로스쿨 졸업생 10명 채용’ 진행중
“예비법조인들에게 희망 주고 싶어”

판사 출신이지만 ‘전관예우’ 반대
다양한 비법학 전공 인재 더 필요
“사람이 가장 중요” 비정규직 없어

“10명을 채용하자고 하니까 다들 난리가 났죠. 우리 로펌 규모에 비해 너무 많다고. 그래서 내가 말했죠. ‘내 사재를 털어서라도 새로 뽑힌 변호사들 월급 줄 테니까 뽑자’고.”

지난해 말 황 대표가 신규 채용에 부정적인 파트너(경영 참여 변호사)들한테 말한 ‘사재 출연’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그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로펌도 기업이니까 고용 창출을 해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 기성세대 몫을 좀 줄이더라도 청년들한테 기회를 줘야 한다.” 극심한 취업 한파에 희망을 잃고 있는 예비법조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취지였다. ‘사재를 내놓겠다’는 그의 진정성에 결국 파트너들은 신규 채용에 동의했고, 지난 20일 로스쿨 졸업생들을 상대로 1차 면접을 진행했다.

충정의 신입 변호사 보수 체계는 이렇다. 첫 6개월 견습 기간에는 월 300만원을 받고, 나머지 6개월은 500만원을 받는다. 1년 동안 실적을 평가한 뒤 재계약이 결정되면 기존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실적에 따라 연봉을 받게 된다. 초봉이 월 800만원 수준인 대형 로펌에 비하면 적지만, 견습 기간에는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에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다. 황 대표는 “더 많은 로스쿨 졸업생들한테 기회를 주기 위해 보수는 좀 줄였다”고 말했다.

충정이 법원·검찰 출신 ‘전관’이나 사시 합격생이 아닌 로스쿨 졸업생 위주로 채용을 하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다. 로스쿨이 애초 도입 취지와 달리 변호사 시험 대비 위주로 교육이 진행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다양성과 전문성을 갖춘 잠재력 있는 변호사를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응시한 지원자 대부분은 비법학 전공자였다. 약학과 생명공학 등 전공이 다양했다. 황 대표는 “기존 법대 출신 변호사들은 복잡한 금융 분야나 신기술 관련 자료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 로펌이 새로운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려면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전관예우’에 대한 강한 반감이다. 황 대표도 판사 출신인 ‘전관’이지만, 전관예우 관행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시에 합격하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관예우가 낳은 웃지 못할 풍경이다. “전관이라는 이유로 법원이나 검찰에서 사건을 잘 봐주니까, 사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평생 잘 먹고 잘산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는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고 변호사가 늘어나면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안 통하게 됐다. 로스쿨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면 변호사들이 ‘전관’ 여부가 아닌 경쟁력만으로 승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시(고등고시 사법과) 13회 출신인 황 대표는 국내 첫 ‘기업 고용 변호사’였다. 1965년부터 10년 동안 판사 생활을 한 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한테 스카우트됐다. 당시 판사 출신이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기업에 취직한 것은 법조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2년 만에 대우그룹 고위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대기업에 만연한 ‘불투명한 경영’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황 대표는 충정을 설립한 뒤 국내에 투자한 외국기업의 자문 업무를 하면서 재벌의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의 문제점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최근 재계와 국회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배임죄 완화’ 주장에도 비판적이다. 그는 “배임죄를 완화하게 되면 자칫 재벌 총수가 하는 행위는 모두 기업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감시가 소홀해질 수 있다.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재벌 2, 3세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2년 동안의 대기업 임원 경험이 황 대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점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경영철학이다. 충정에는 현재 비정규직이 없다. 렌털회사와 계약한 업무용 차량 운전기사 말고는 모두 정규직이다. “직원들이 책임감을 갖게 하려면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비정규직을 쓰면 당장 비용은 줄일 수 있겠지만, 책임감은 기대할 수 없어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되려면 여유있는 이들이 조금 양보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법조계에서 나 같은 기성세대는 좋은 시절을 보냈으니까, 이제는 후배들을 위해 좀 양보해야지. 그래야 법조계가 발전하는 겁니다.” 혹독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변호사 2만명 시대’에 황 대표의 제안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내란 중요임무 종사’ 조지호 경찰청장·김봉식 서울청장 구속 1.

[속보] ‘내란 중요임무 종사’ 조지호 경찰청장·김봉식 서울청장 구속

여인형, 그날 밤 대통령 경호 전문부대 국회 투입하려 했다 2.

여인형, 그날 밤 대통령 경호 전문부대 국회 투입하려 했다

아이유 “언 손 따뜻하길” 탄핵 집회에 국밥·핫팩 쏜다 3.

아이유 “언 손 따뜻하길” 탄핵 집회에 국밥·핫팩 쏜다

“탄핵, 그리고 다음 채우려”…국회 표결 전야 15만명 여의도로 4.

“탄핵, 그리고 다음 채우려”…국회 표결 전야 15만명 여의도로

앵커도 기자도 까맣게 입고 ‘블랙 투쟁’…14일 탄핵 표결까지 5.

앵커도 기자도 까맣게 입고 ‘블랙 투쟁’…14일 탄핵 표결까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