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조영래상’ 받은 김진·권두섭 변호사
그들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곳은 조영래 변호사가 만든 ‘시민공익법률사무소’였다. 이들은 출세보다 법이 필요한 사람 곁을 지키겠다는 선배 인권변호사들의 길을 따르고자 했다. 1999년 당시 김진 변호사(사법연수원 28기·법무법인 지향)는 시민의 1년차 변호사였고, 권두섭 변호사(사법연수원 29기·민주노총 법률원장)는 시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청노동자 해고는 원청 책임’
노동자 권리 진전 판결 이끌어 김 “전업 공익변호사는 못해도
10분의 1은 공익활동 다짐했죠” 권 “부당노동행위 상담 활동 때
줄서 기다리는 이들 보고 이 길로” 1년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모두 사법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 활동을 했다. 특히 외환위기(IMF) 직후 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권 변호사는 “학회 활동을 하면서 일주일에 2~3번씩 민주노총 부당노동행위고발센터로 상담활동을 나가게 됐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상담을 기다렸다. 노동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뚜렷해졌다”고 했다. 김 변호사 역시 “연수원 수료 뒤 ‘시민’에서 일을 배우면서 노동변호사가 되기로 했다”고 했다.
김진 변호사와 권두섭 변호사는 조영래 변호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올해 제정한 ‘조영래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상은 조 변호사 25주기를 맞아 한시적으로 주는 것이라 이들은 이 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자이기도 하다. 심사위원회는 모두 13명의 변호사를 추천받아 두 달 동안 엄격한 심사를 한 뒤 수상자를 선정했다. 두 변호사는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그간의 활동이 미화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의미있는 판결을 이끌어내는 것은 혼자의 힘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이 모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와 권 변호사가 공동으로 변호를 맡아 ‘하청업체 노동자 해고에 원청의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이끌어낸 것은 노동자의 권리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0년 대법원은 현대중공업이 사내하청 노동조합을 설립한 하청업체 직원들을 해고한 것은 부당노동행위이고, 이들의 사용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권 변호사는 경찰의 알몸 신체검사는 헌법상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외교공관 100m 이내에서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이끌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 변호사 역시 실업자가 포함됐다는 이유로 서울시가 노조설립 신고를 반려한 ‘서울여성노조 사건’의 변론을 맡아 2004년 대법원에서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구직중인 사람도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들에겐 승리의 기억보다 패배의 상처가 더 깊게 남아 있다. 판결에 져서 노동자들이 복직하지 못하고, 수백억원의 손해배상 가압류를 당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패소할 때마다 “내가 괜히 사건을 맡아서 진 거 아닐까”라는 미안함이 들었다. 특히 ‘2009년 철도노조 파업’을 대법원에서 업무방해죄를 유죄로 인정해 사건을 파기 환송한 것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가슴 아팠다. 김 변호사는 “그땐 ‘정말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고 물러설 수 없었다.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해 고통받는 노동자가 많아지는 만큼 노동변호사가 해야 할 역할도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16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달라진 건 분명히 있다. ‘제2의 조영래’를 꿈꾸는 후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 변호사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려는 후배들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그런 활동과 무관한 곳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선배들이 노동·인권 변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못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전업으로 공익변호사 일을 하고 있진 않지만, 늘 내 시간의 10분의 1은 공익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경제적 형편상 공익변호사를 못할 수도 있고,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게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영지 김지훈 기자 yj@hani.co.kr
노동자 권리 진전 판결 이끌어 김 “전업 공익변호사는 못해도
10분의 1은 공익활동 다짐했죠” 권 “부당노동행위 상담 활동 때
줄서 기다리는 이들 보고 이 길로” 1년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모두 사법연수원에서 노동법학회 활동을 했다. 특히 외환위기(IMF) 직후 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권 변호사는 “학회 활동을 하면서 일주일에 2~3번씩 민주노총 부당노동행위고발센터로 상담활동을 나가게 됐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상담을 기다렸다. 노동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뚜렷해졌다”고 했다. 김 변호사 역시 “연수원 수료 뒤 ‘시민’에서 일을 배우면서 노동변호사가 되기로 했다”고 했다.
권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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