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의미에서 자학의 역사관, 부정의 역사관은 절대 피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은 이 땅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달 2일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들의 소위 ‘자학사관’을 비판한 말이다. ‘자학사관’은 1990년대 일본 사회당 정부의 ‘식민 지배 반성’(무라야마 담화)에 반발해 일본 극우들이 사용한 용어다. 일본 극우세력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우리 검정교과서들이 우리 역사를 자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대부분 전문가들은 ‘아니오’라고 답한다.
실제 18일 <한겨레>가 현행 검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을 분석한 결과, 모든 교과서들이 교육부의 집필기준에 따라 대한민국의 해방·민주화·산업화의 역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안병우 한신대 교수(한국사학과)는 “검정 교과서들은 모두 우리의 독립운동 과정, 경제적 성취, 민주화 등을 잘 서술하고 있고, 우리 민족이 이룩한 발전적 모습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점기 서술 독립운동에 방점
친일행위 관련된 내용 거의 없어
박정희 독재·경제성장 함께 기술
크게 보면 해방·분단극복·민주화
국민이 주체가 된 ‘승리의 역사’
■ 친일과 독립운동 현행 검정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일제 식민지 시대를 서술을 보면, 오히려 친일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친일’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반면 8종 교과서 모두 ‘독립운동’ 부분은 교과서 전체 6개 단원 중 한 단원이 ‘일제 강점과 민족운동의 전개’일 정도로 비중이 높다. 교육부의 집필기준이 친일보다는 독립운동 서술에 방점이 찍혀 있는 탓이다.
2009 교육과정의 집필기준을 보면 ‘일제 강점기 시기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저항운동에 대하여 파악한다’거나 ‘3·1 운동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고’ 등 독립운동 서술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돼 있다. 이에 따라 8종 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 방식은 대동소이한데, 예를들어 미래엔 교과서 260쪽을 보면 “3·1 운동은 (…) 모든 계층이 참여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단합된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천명하였다”며 서술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친일 인사나 친일 행위에 서술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파악’하는 정도의 기준이 있을 뿐이다. 금성출판사 372쪽에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보다는 반공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펴며 반민 특위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 결국 반민 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정도의 서술이 있는 정도다.
■ 독재와 민주화·경제성장 정부 여당과 뉴라이트 학자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6·25전쟁 당시 전체주의와 통제경제시스템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시스템을 지켜낸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등 군사독재를 실시한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해야 하는데 검정교과서들이 독재만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안병우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파괴해서 쫓겨난 것과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한 것은 사실인데 그걸 서술했다고 자학사관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현행 검정 교과서들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 공과를 공정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 집필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8종 교과서의 이 부분 서술은 엇비슷한데, 예를들어 비상교육 교과서의 박정희 정부 서술을 보면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 산업 구조의 근대화에 힘썼다. 이때 경부 고속 국도가 건설되었으며, 베트남 특수로 인해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였다”(374쪽) “(부·마 민주 항쟁). 학생들은 독재 타도, 빈부 격차 해소 등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시민이 동참하면서 시위가 확산되었다. (…) 유신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368쪽)고 서술해 박정희 정부의 명암을 다 서술하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한국 현대사를 민주화와 산업화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은 세계 어느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긍정적인 역사 서술’이라고 강조한다. 김한종 한국 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우리는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2차 대전에 휘말린 국가 치고는 드물게 민주화가 진전됐고, 이를 부각시켜 다룬 건 자학사관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관”이라고 말했다. 정치·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점을 내세우는 것은 우리나라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의 ‘클라이맥스’라는 지적이다.
■ 식민지·독재 극복한 민주화·산업화의 역사 정부 여당의 자학사관 주장은 2000년대 중반 뉴라이트 학자들의 주장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뉴라이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한국 근현대사의 긍정적인 면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정 교과서들이 대한민국 수립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기보단 남북 분단을 강조하고,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기보단 독재와 재벌·빈부격차를 부정적으로 서술한다는 불만이 크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나 과오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말라는 요구에 가깝다.
역사 교육의 목표는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와 미래에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는 역사교육은 역사라기보단 ‘국가홍보’로 봐야 한다고 우려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공통적인 전제는 ‘식민지를 극복하고 분단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한 역사’라는 점이다. 그 전제 위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런 성과들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갈 수 있느냐’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 그것을 자학사관이라고 한다면 역사학으로서 임무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현행 교과서들의 역사 서술을 긍정적으로 볼 것이냐 부정적으로 볼 것이냐는 ‘대한민국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냐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주체를 통치자와 지배층으로 본다면 친일과 독재에 관해 서술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체가 국민이고 시민이라고 본다면, 우리 역사는 친일과 독재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 극복한 ‘승리의 역사’가 된다.
<끝>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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