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겨레 경제지 같다는 인터넷 매체 를 창간한 장호권 씨가 서울 여의도 사무실 앞에 섰다. 강창광 기자chang@hani.co.kr
[인터뷰] 장준하 아들 호권씨 “박정희 망령이 되살아나다니…”
“지금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하셨을 일들을, 30년이 지난 지금 제 몸을 빌려 하는 것뿐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대표적 민주화 인사인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권(57)씨는 부친이 창간했던 종합교양지 ‘사상계’ 복간을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50~60년대 문인과 지식인의 대변지이자 독재정권에 칼날을 들이댔던 ‘사상계’가 70년 폐간된 뒤 35년 만인 10일 ‘e-사상계(esasangge.com)’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다.
그가 사상계 복간을 서두르는 이유는 아버지의 분신, 또는 가업을 떠나 구심점 없이 시대에 휘둘리는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미래와 철학, 올바른 사상과 이념,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해방과 6.25 이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사상계가 구심점 역할을 했어요.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이념과 계층, 세대별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사상계’를 통해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려고 했을 거예요.”
그가 보는 지금 상황은 50~6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식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회는 혼란스럽다. 사회가 양분되고, 언론도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재정권 시절, 편향된 반공이데올로기를 주입한 지식인들이 현재 정치인과 판·검사 등 사회지도층이 됐잖아요. 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출세지향과 개인주의만 심어주고 있잖아요. 해방 이후 정신적 구심점을 심어줬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지금의 총체적 혼란기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철학과 국가관, 역사관을 정립시킬 거예요.”
‘사상계’ 복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일
장준하, 집없이 서른여섯번 이사…호권씨도 18평 임대아파트로
4일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표정은 밝았다. 부리부리한 눈, 짙은 눈썹, 중저음의 목소리는 고 장준하 선생을 고스란히 빼닮았다는 평을 받는다. 자연히 그에게는 늘 ‘장준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손님들이 오셨을 때 “재떨이를 치우라”며 항상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귀동냥시켰고, 아버지가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을 읽을 때는 늘 곁에서 책을 읽게 했다. 철이 든 뒤에야 아버지의 이러한 소리없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때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던, ‘아버지’보다는 ‘선생’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장준하’가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1975년 쉰일곱살 ‘장준하’와 2005년 ‘장호권’은 외모만큼이나 많이 닮아 있다. 18년간 외국생활을 통해 모은 돈으로 2003년 귀국한 뒤 풍족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대형아파트와 고급자동차가 아닌 18평 임대아파트를 택했다. 대신 사재를 몽땅 털어 사상계 복간을 준비하는 것도 소유욕이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 “한번도 우리집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1956년 아버지가 7년에 걸쳐 신촌에 집을 지었는데, 완공 뒤 3개월 만에 쫓겨났어요. 그 뒤로 서른여섯번 이사를 다녔죠. 집이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요.”라고 말했지만, 그만큼 그가 ‘사상계’에 거는 애정과 기대는 남다르다. 그는 ‘사상계’ 복간이 사명이라고 판단, 각 정당의 정치입문 제의도 정중히 거절했다. “‘큰 아이는 정치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도 있었고,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젊은이들에게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가르치고, 사회의 구심점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은 국회의원 100명이 하는 일보다 중요해요.” “사상계는 진보와 보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기치 아래 이데올로기를 배제할 겁니다. 개인의 부와 명예,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버린 지식인들에게 약자, 민족과 사회를 배려하게 만드는 지침서가 될 겁니다.” 장씨는 10일 온라인 창간에 이어 연말께 오프라인 ‘사상계’를 선보일 예정이다. 아버지 의문사 뒤 ‘심야테러’ 극도의 공포에 결국 외국으로 “일단 살아 있어야 아버지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귀국 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가, 젊은시절 한국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극도의 공포감”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독재정권은 그의 가족을 철저히 격리시켰다. 아무도 그들을 찾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생계를 위한 일자리도 힘들었다. 오죽하면 “쌀을 훔칠” 생각을 했을까. ‘이러다 굶어죽겠구나’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그가 외국행을 결심한 데는 아버지가 의문사한 이듬해인 1976년 4월19일 밤 네명의 괴한에게 당한 테러였다. 테러로 턱이 산산조각 난 그는 8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의 턱은 백금으로 간신히 이어놓은 상태다. 그 뒤 3개월의 입원기간 동안 쇠사슬로 이빨을 묶어 놓은 채 고통을 견뎌야 했다. “퇴원 당시 몸무게가 38kg이었어요. 잘 생긴 얼굴이었는데(웃음), 테러 이후 입이 삐뚤어졌죠. 그때 든 생각이 아버지도 죽였는데, 나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겠구나 싶었죠. 정치활동이나 민주화운동을 떠나 살아 있어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독재정권의 탄압을 몸소 체험했던 탓인지, 그는 ‘박정희’, ‘유신독재’ 얘기를 할 때면 목소리에 핏발이 섰다. 박정희 망령이 되살아나고, 과거청산 작업이 흐지부지되는 것도 불만이다. “박정희가 누굽니까? 을사늑약 때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랑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경제발전의 공로를 인정하자고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떡고물을 받아먹은 것에 불과해요. 떡은 재벌과 기득권을 가진 친일세력이 다 먹었죠. 잘못된 경제성장 결과, 지금 휘청거리고 있는 거잖아요.” “박정희?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랑 다른 게 뭐가 있나” 핏발 선 아들의 분노 그는 6.25 이후 부친이 집필했던 ‘브니엘’이라는 이름의 책을, <돌베게> 후속편으로 발간할 계획도 갖고 있다. 또 경제적 이유로 포기했던 학업에도 열중이다. 외교관의 꿈을 키웠던 그는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6개월만에 그만뒀다. 당시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지원을 약속했지만, 아버지는 이러한 호의를 ‘부정’이라며 거절했다. 그 뒤 향학열에 불탄 그는 외국에서 전문대학을 졸업했으며, 귀국 후에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박정희 얘기 할 때는 객관적인 표현은 나올 수 없다는 장호권 씨. 강창광 기자chang@hani.co.kr
그렇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1975년 쉰일곱살 ‘장준하’와 2005년 ‘장호권’은 외모만큼이나 많이 닮아 있다. 18년간 외국생활을 통해 모은 돈으로 2003년 귀국한 뒤 풍족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대형아파트와 고급자동차가 아닌 18평 임대아파트를 택했다. 대신 사재를 몽땅 털어 사상계 복간을 준비하는 것도 소유욕이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 “한번도 우리집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1956년 아버지가 7년에 걸쳐 신촌에 집을 지었는데, 완공 뒤 3개월 만에 쫓겨났어요. 그 뒤로 서른여섯번 이사를 다녔죠. 집이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요.”라고 말했지만, 그만큼 그가 ‘사상계’에 거는 애정과 기대는 남다르다. 그는 ‘사상계’ 복간이 사명이라고 판단, 각 정당의 정치입문 제의도 정중히 거절했다. “‘큰 아이는 정치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도 있었고,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젊은이들에게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가르치고, 사회의 구심점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은 국회의원 100명이 하는 일보다 중요해요.” “사상계는 진보와 보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기치 아래 이데올로기를 배제할 겁니다. 개인의 부와 명예,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버린 지식인들에게 약자, 민족과 사회를 배려하게 만드는 지침서가 될 겁니다.” 장씨는 10일 온라인 창간에 이어 연말께 오프라인 ‘사상계’를 선보일 예정이다. 아버지 의문사 뒤 ‘심야테러’ 극도의 공포에 결국 외국으로 “일단 살아 있어야 아버지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귀국 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가, 젊은시절 한국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극도의 공포감”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독재정권은 그의 가족을 철저히 격리시켰다. 아무도 그들을 찾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생계를 위한 일자리도 힘들었다. 오죽하면 “쌀을 훔칠” 생각을 했을까. ‘이러다 굶어죽겠구나’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그가 외국행을 결심한 데는 아버지가 의문사한 이듬해인 1976년 4월19일 밤 네명의 괴한에게 당한 테러였다. 테러로 턱이 산산조각 난 그는 8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의 턱은 백금으로 간신히 이어놓은 상태다. 그 뒤 3개월의 입원기간 동안 쇠사슬로 이빨을 묶어 놓은 채 고통을 견뎌야 했다. “퇴원 당시 몸무게가 38kg이었어요. 잘 생긴 얼굴이었는데(웃음), 테러 이후 입이 삐뚤어졌죠. 그때 든 생각이 아버지도 죽였는데, 나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겠구나 싶었죠. 정치활동이나 민주화운동을 떠나 살아 있어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독재정권의 탄압을 몸소 체험했던 탓인지, 그는 ‘박정희’, ‘유신독재’ 얘기를 할 때면 목소리에 핏발이 섰다. 박정희 망령이 되살아나고, 과거청산 작업이 흐지부지되는 것도 불만이다. “박정희가 누굽니까? 을사늑약 때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랑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경제발전의 공로를 인정하자고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떡고물을 받아먹은 것에 불과해요. 떡은 재벌과 기득권을 가진 친일세력이 다 먹었죠. 잘못된 경제성장 결과, 지금 휘청거리고 있는 거잖아요.” “박정희?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랑 다른 게 뭐가 있나” 핏발 선 아들의 분노 그는 6.25 이후 부친이 집필했던 ‘브니엘’이라는 이름의 책을, <돌베게> 후속편으로 발간할 계획도 갖고 있다. 또 경제적 이유로 포기했던 학업에도 열중이다. 외교관의 꿈을 키웠던 그는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6개월만에 그만뒀다. 당시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지원을 약속했지만, 아버지는 이러한 호의를 ‘부정’이라며 거절했다. 그 뒤 향학열에 불탄 그는 외국에서 전문대학을 졸업했으며, 귀국 후에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사상계 복간을 앞두고 있는 장호권씨는 간혹 미소년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곤 한다. 강창광 기자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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