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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단독] 국가 번역사업 ‘홀대’…올해 예산 달랑 10억원

등록 2015-03-04 01:10수정 2015-03-04 01:34

관람객들이 국제도서전에서 전시 판매되는 책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은 없습니다.)
관람객들이 국제도서전에서 전시 판매되는 책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은 없습니다.)
유일한 정부지원 ‘국외 고전번역’
해마다 과제 줄고 예산은 ‘반토막’
“이공계 과제 1건에도 10억 쓰면서…”
출판계 등 ‘정부 전담기구’ 입모아
소설가 고종석은 그의 책 <감염된 언어>에서 “인류 문화사의 관점에서 늘상 나를 황홀경으로 몰고 가는 한 시기가 있다”고 말했다. 고종석은 고대 그리스·로마나 중국 당대, 조선의 영·정조 실학 전성기가 아니라 “일본의 에도 중기 이래의 난학(네덜란드학)과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 시기”를 그때로 꼽았다. “궁극적으로 세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만들 발판을 마련”해서란다.

당시 일본에선 ‘번역국’이란 정부 기관을 중심으로 서양의 학술서를 대거 번역해 되도록 많은 이가 인류의 지적 성과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풍성한 지식의 밥상은 근대화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번역국은 1811년 에도 막부 말기 ‘막부천문대번역국’이 기원이다. 이 기관은 번역뿐만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자 외교 자문 기구 구실도 했다. 메이지 정부도 번역국을 공식 정부 기관으로 뒀다. 번역국은 1877년 설립된 도쿄대가 그 구실을 대체하고 나서야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이슬람·서유럽의 번역 사업은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이뤄졌다”며, 한국 정부의 미흡한 지원과 열악한 번역 인프라 탓에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백년 넘게 벌어져 있다”고 탄식했다.

정부의 국외 고전 번역에 대한 인식은 유일한 정부 지원 국외 고전번역사업인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사업’의 역사에서 엿볼 수 있다. 명저번역지원사업의 예산과 과제 수는 3년 전부터 감소해왔다. 3일 <한겨레>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혜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통해한국연구재단한테 받은 자료를 보면, 올해 명저번역지원사업 예산은 10억6300만원이다. 2011년 24억원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같은 기간 과제 건수도 89개에서 24개로 대폭 감소했다. 2012년과 2013년엔 신규 과제 모집을 하지 않아 학계에선 이 사업이 아예 없어진 걸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명저번역지원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의 전신인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해 1998년에 시작됐다. 지난 18년간 396종 696권(1월 기준)의 고전이 번역됐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같은 잘 알려진 고전부터 유검화의 16권짜리 <중국고대화론유편> 같은 방대한 분량의 생소한 고전까지 망라했다.


기재부, ‘번역사업’ 몰이해“예산 들일 필요있나” 삭감

번역자 과제당 2688만원 그쳐
일·중·유럽 국가가 전폭적 지원
전문가 “예산과 과제 수 늘리고
체계적인 번역 추진 필요“ 지적

명저번역지원사업의 예산과 과제 수는 왜 줄고 있는 것일까. 한국연구재단은 기획재정부와 교육부가 결정한 예산을 수탁해 이 사업을 운영한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교육부는 예산 협의 과정에서 예산을 동결하자고 했으나, 명저번역지원사업에 대한 이해가 없던 기재부는 ‘학자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예산을 들여 번역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를 폈다. ‘이만큼 사업을 했으면 웬만한 고전은 대부분 번역된 것 아니냐’고도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명저번역사업에 한해 투입되는 10억원은 이공계 분야 연구 과제 1건에 지원되는 예산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국가과학자’ 사업은 10명의 과학자를 선정해 1명당 매년 15억씩, 최장 10년간 연구비를 지원한다.

명저번역지원사업에 참여한 번역자는 과제당 평균 2688만원을 받는다. 민간 상업 출판사가 지급하는 번역료에 견주면 수십배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명저번역지원사업으로 장 보댕의 <국가에 관한 6권의 책>을 번역한 나정원 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번역의 전문성과 노력을 고려하면 명저번역지원사업의 번역료도 결코 많은 게 아니다. 민간 상업 출판사가 지급하는 번역료가 지나치게 낮아서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간 상업 출판사를 통해 번역서를 내면, 번역자는 판매된 책값의 6% 남짓을 번역료로 받는다. 2만원짜리 책을 1000부 발행해 모두 팔린다고 가정해도 120만원이다. 1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번역해 최근 출간한 김재인 박사가 출판사에서 받은 번역료는 350만원으로 알려져 있다. 번역의 대가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사정 탓에 명저번역지원사업은 민간 출판사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출간하기 힘든 책을 펴낼 수 있는 기회이다. 한국연구재단의 지원만큼 출판사가 부담을 덜 수 있어서다. 한국연구재단이 번역료와 교정·교열비, 번역권 비용을 부담하고, 도서관 배포용으로 1종당 150권가량의 책을 구입한다. 명저번역지원사업을 통해 번역된 고전을 출판해 온 아카넷 김정호 대표는 “학자들은 돈이 아니라 책임감과 학문 발전을 위해 번역에 참가한다. 출판사도 큰 이익은 안 되지만 의미 있는 사업이라 명저번역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번역서의 활용도를 높이고 번역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려면 좀 더 대중적인 고전을 명저번역지원사업 과제로 고르는 등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우선순위를 정해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번역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용주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는 “한자사전처럼 일반인이 관심을 갖기 어려운 책을 명저번역지원사업에서 출판하는 경우가 꽤 있다. 학자들이 자신의 번역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판단하고 번역에 나서야 한다”고 짚었다.

쥐꼬리만한 예산 탓에 번역서의 절대량이 부족한 형편에 번역 기간마저 짧아 저질 번역 논란이 불거지기도 한다. 지난해까지는 1권이든 16권이든 번역을 최대 2년 안에 끝내야 했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그 기간을 최대 3년으로 늘렸다. 하지만 분량이 방대한 고전 번역엔 여전히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학계와 출판계는 명저번역지원사업에 대한 예산 확대와 더불어 이를 전담할 정부 기구를 따로 두자고 입을 모은다. 나남출판사의 고승철 사장은 “학문 체계를 세우려면 중요 고전 번역은 필수다. 보여주기식 행사 하나에 몇십억원을 쓰는 정부가 지원하는 유일한 고전 번역 사업 예산이 10억원뿐이라니 참담할 뿐”이라고 말했다. 박상익 교수는 “명저번역지원사업의 예산은 거칠게 표현하면 거지한테 동전 몇 푼 쥐여주는 수준이다.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이를 전담할 번역청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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