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고령자고용촉진법’은 정년제가 합법적인 것임을 전제로 60세 정년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년제의 끝은 무엇일까요? 빈곤! 바로 절대적 빈곤입니다. 정년제가 도입된 60년대 평균수명은 60세 남짓이었습니다. 지금 평균수명은 78세로 높아졌지만 정년은 그대로입니다. 정년연장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연령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니요. 무능력하고 비생산적인 노동력을 기업이 자신의 비용부담으로 계속적으로 끌어안으라는 겁니까! 이건 마치 뜸도 들이기 전에 밥솥을 열어 김을 다 빼는 일 아닙니까?”
29일 오후 2시 서울 송파구 한국지역사회교육회관 새이웃소극장에서 이색행사가 열렸다. “나이 먹는 게 죄냐!!”는 주제로 풍자 모의재판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효율성을 빌미로 조기퇴직과 연령차별 등으로 장·노년 인력을 배제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경제력 박탈 뒤 빈곤에 허덕이는 노인들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대한은퇴자협회가 마련한 자리다.
대한은퇴자협회가 지난 6월17일부터 7월16일까지 30일 동안 ‘늙은 게 죄라고 생각하느냐’고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707명 가운데 95%인 674명이 “그렇다”고 답한 것이 이번 행사의 계기가 됐다. 많은 이들이 노인을 대하는 사회나 기업 분위기, 정부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경제력 상실에 대한 박탈감이 컸다. 노인을 소외시키는 정부와 기업의 잘못인가. 아니면 ‘일자리를 달라’는 노인의 잘못인가.
대한은퇴자협회가 기획한 ‘나이 먹는 게 죄냐!!’ 풍자 모의재판을 바라보는 회원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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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 본 사건 “나이 먹는 게 죄냐”는 대한은퇴자협회에서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95%가 ‘그렇다’고 답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해 정녕 늙은 건 죄인지에 대한 판결을 구하고자 고소를 제기하였습니다. 참고로, 사건 의뢰인은 일할 수 있음에도 일할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 대한민국 노년층 다수이며, 그들을 대표한 대한은퇴자협회입니다. 기소 사건의 취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 조기퇴직 종용 금지의 건, 하나. 연령차별 금지의 건 및 정년연장의 건으로 각각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공소를 제기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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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극예술연구회 대학생 10여명이 참여한 이 모의재판은 “단지 겉모습에서 젊음을 잃었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받는 어르신들의 고통 어린 절규를 듣고자 한다. 젊음의 퇴색을 이유로 생존권을 박탈할 자격이 그 누구에게 있는지 물어보자”는 사회자 발언으로 무겁게 시작됐다. 장내에는 50여명의 50~70대 노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재판은 노인 편에서 기업과 국가 등을 상대로 조기퇴직 종용 금지, 연령차별 금지, 정년연장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검사(원고)’와 기업과 정부 편에서 이들을 옹호하는 ‘변호사(피고)’ 사이의 날선 공방으로 이어졌다. 원고쪽 증인으로 출석한 나정정, 기산려, 오륙도는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하며, 평균수명이 높아진 만큼 정년연장도 필요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피고쪽 증인인 기업가, 노여론(정부와 국가를 대표), 백수남(청년실업 현실을 대변)은 “무능력하고 비생산적인 노동력을 고용한 비용 부담을 기업이 끌어 안아서는 안된다”(기업가), “고령화사회 대책은 급한 불부터 끄고 만들겠다. 조금만 기다려라”(노여론), “노인에게 일자리를 주면, 청년실업자가 양산된다”(백수남)고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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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은퇴자협회는 9월29일 한국지역사회교육회관 새이웃소극장에서 ‘나이 먹는 게 죄냐!!’는 제목으로 풍자 모의재판을 열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늙은 게 죄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한 응답자가 95%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정부는 코 앞으로 다가온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책이 있습니까?”(검사)
“국가에서도 발 쭉 뻗고 누워 있는 것 아닙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인데 국가에서 어련히 알아서 안 할까 봐 걱정입니까?”(정부쪽 대표 노여론)
“힘 없는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검사)
“생산직은 좀 싼 중국이나 베트남쪽, 그 외에는 인턴이나 계약직을 뽑아서 쓰고 있습니다. 뭐 힘있는 젊은 인력들이 취지 못해 안달인데….” (기업쪽 대표 기업가)
“노인 실업 문제도 관건이지만, 현실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피고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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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의 추궁과 항변은 계속 이어졌다. “충분히 일할 수 있고, 또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자신의 분야에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되어서는 안됩니다. 노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관심사는 노후 소득지원으로, 많은 이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또 2050년에는 노인부양비율이 70%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다가올 고령화사회에 대한 대착 일환에서도 현행 ‘60세 정년’을 연장하고, 정년 퇴직자를 재고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만큼 노인의 연령개념을 재설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인문제, 노령인구 부양문제, 국민연금 수급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피고쪽 변호사는 “고령화사회는 30~40년 후의 일입니다. 현재가 붕괴된다면 30~40년 후의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급한 건 젊고 잠재력있는 인재들을 교육시켜 세계시장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경제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정년연장 해야죠. 하지만 하루아침에 뜯어 고치려 한다는 것은 성급한 행위입니다. 법 제정에도 절차가 있는 법이고, 다 국가가 알아서 할 일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입니다.”
모의재판이 진행된 행사장 곳곳에는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 - HERO(영웅)”이라는 피켓이 꼳혀 있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1시간 남짓 진행된 재판에서 재판부는 “노년층에게 조기퇴직을 종용하여 그들의 경제권을 빼앗고 향후 불어닥칠 인력난을 보지 못한 기업에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죄’를 물어 세대 통합을 위한 YOU(‘Young and Old United’) 운동 3만6500시간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여론에 휩쓸려 사태의 본질도 파악하지 못하고 힘없이 끌려가면서 ‘이리저리 눈알 굴린 죄’를 물어 정부에 조기퇴직 종용 금지와 연령차별 금지, 정년연장의 법제화에 따른 적극적인 역할을 제도적으로 수행할 것을 촉구한다”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변호사의 항변에도 불구 노인의 일자리를 뺏어 경제력을 박탈시키는 사회와 기업에 죄를 물어 노인들의 경제력 확보에 정부나 기업의 책임있는 역할 수행을 주문했다.
행사를 기획한 주명룡(60) 대한은퇴자협회 회장은 “고령화 사회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돼 있지만 정작 국가와 사회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노인 인력 활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며 “노인과 은퇴자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연령차별금지법과 고령인고용촉진법이 법제화될 때까지 대정부 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 주명룡(60) 대한은퇴자협회 회장 일문일답
대한은퇴자협회 주명룡 회장.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이번 행사를 기획한 취지는.
= 지난 4년간 협회가 해온 연령차별금지 캠페인 일환이다. 정부가 2003년 제정하기로 약속했던 연령차별금지법과 고령자고용촉진법 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법 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인데, 이번 행사가 그 시작이다.
- 모의재판 형식을 도입한 이유는.
= 쉽고, 재밌게 우리의 주장을 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정 나이먹는 게 죄인가?’ 묻고 싶었다. 청년실업과 효율성을 이유로 경험과 전문지식이 풍부한 고령자를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으로 쫓아낸다. 많은 이들이 생계수단을 잃고, 경제력을 상실해 빈곤한 생활을 한다. 평균수명이 78세까지 높아졌다. 당연히 정년을 낮추고,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줘야한다.
- 고령자 고용촉진 왜 필요한가.
= 50~60대쯤 되면 업무에 익숙하고 한창 자녀 뒷바라지할 때다. 이들의 소득원천을 뺏는다면 가정은 파탄난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재취업의 기회는 거의 없다. 나이 많다는 이유로 많은 기업에서 꺼린다. 2050년에는 노인부양비율이 70%에 이른다고 한다. 노동력이 절대 부족하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부족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점 해결과 고령화사회 진입에 대비해서라도 고령자 고용촉진에 더욱 신경써야 한다. 국가는 은퇴자 등 노령자의 노후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 향후 계획은.
= 당장은 다음달 15일(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은퇴자 동시걷기 대회 및 YOU 축제가 예정돼 있다. 조기퇴직 종용 금지와 연령차별 금지, 정년연장의 법제화를 지속적으로 촉구할 것이다.
- 대한은퇴자협회(www.karpkr.org)는 어떤 곳인가.
= 노령 사회의 주역이 될 젊은 세대와 장노년층을 위한 사회 제도 개선 운동과 권익을 옹호하고 은퇴문화를 정착시키는데 목적을 둔 비정부기구(NGO)로 2001년 설립됐다. 현재 회원만 3만6천명이다. 정년제 연장과 조기퇴직종용금지법 입법 청원 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 주명룡 회장은 어떤 사람?
뉴욕에서 한인회장, 한인식품상회 대표 등의 활동을 하다 미국의 노인들이 협회를 만들어 스스로의 권익을 부르짖고, 사회봉사를 하고 있는 점을 보고 한국에서도 노인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이민 30년 만인 2002년 영주귀국해 협회를 창립해, 노인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 EU 노년연합회가 주최한 행사에 다녀왔다는 그는 ‘아시아 노년단체연합’을 만들 생각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