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에게 ‘이별 편지’를 쓴 경비원 ○(61)씨가 지난 27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 초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진 최우리 기자
“경비원 ○○○입니다. 제가 △△△동에서 근무한 지도 2년9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을 뒤로하고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삶이 무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미련 또한 버리지 못하고, 왠지 허전하기까지 하네요.”
동료 경비원이 분신해 숨지고,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는 해고 예고 통보를 받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원 ○(61)씨가 지난 26일 자신이 경비를 맡은 동 주민들에게 ‘이별 편지’를 미리 썼다. 이 편지는 반상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이 아파트는 오는 3일 저녁 7시 입주자대표회의를 열어 해고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앞서 경비원들은 28일 파업을 결의했다.
○씨는 2006년 12월 말부터 이 아파트에서 근무했다. 6개월~1년마다 재계약을 반복하며 60살 정년을 겨우 넘겼다. 현재는 촉탁계약직으로 1년 더 근무 중이다. 1980~1982년께 지어진 이 아파트는 30여년간 한 업체가 계속 관리한 탓에 ○씨처럼 장기근무를 한 이들이 많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경비원들을 계속 고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도 ○씨처럼 촉탁직 근무자들은 해고될 것으로 경비원들은 보고 있다.
편지엔 ○씨의 아쉬운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최근 상황으로)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 또한 작년 말 근무연장 투표까지 하면서 상한 자존심을 다스리며 소신껏 근무를 해왔습니다만 역시나 얻은 것 하나 없이 떠나게 될 것 같아 이렇게 서면으로나마 인사드립니다.”
신현대아파트 관리업체가 지난해 말 경비원 ㅇ씨의 촉탁 근무 여부를 놓고 주민 투표를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안에 붙인 공고문. 사진 최우리 기자
관리업체는 지난해 말 ○씨의 촉탁 근무 여부를 놓고 주민 투표를 했다. 입주자대표자회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씨의 사진을 붙여 놓고 ‘추가 근무’를 해도 좋을지 찬반을 물었다. ○씨는 주민 전원 찬성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날의 기억을 “인민재판”처럼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씨는 그래도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라 여기고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청바지 원단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낸 뒤 처음 시작한 ‘월급쟁이’ 생활은 제법 몸에 맞았다. 이곳에서 일하며 자식 둘을 결혼시켰다. 주민들과의 추억도 많다고 했다.
27일 경비원 초소에서 만난 ○씨는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죠. 깐깐한 사람이야 어디 가든 있는 거고요. 사실 고마운 주민들이 더 많다”고 했다. “근무하던 동에 살던 여학생이 시집가서 남편, 아이하고 친정에 들르는 걸 보면 내가 다 뿌듯해요. 이제는 차 소리만 들어도 누구네 집 차가 들어오는지도 알죠. 경비들이 동을 옮겨가며 일하는데 전에 있던 동의 꼬마가 친구 보러 와서는 친구에게 날 소개해주고 가고 그래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원 ○(61)씨가 지난 26일 자신이 경비를 맡은 동 주민들에게 쓴 ‘이별 편지’. 사진 최우리 기자
입주민과 경비원 사이가 밖에서 보는 것만큼 차갑지는 않다는 얘기다. ○씨는 “오래 일하면 서로 정이 쌓이니까 ‘상하 관계’만은 아니에요. 저만 해도 층간소음 문제도 해결할 겸 서로 알고 지내라고 반상회 열라고 조언도 하고 그러는걸요. 그만큼 함께 보낸 세월이 오래인데….”
○씨는 편지 끝에 “후임으로 누가 이곳에 근무하든 서로 이해와 사랑으로 한 가족같이 생각해주시고 근무자에게는 신바람나는 일터가 되도록 협조 당부드리겠습니다”라고 적었다.
2년 전 겨울 아파트 굴뚝에 올라가 해고자 복직, 정년 연장을 외쳤던 이 아파트 경비원들은 3일 입주자대표회의 결과에 따라 파업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글·사진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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