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소격동은 삼청로길을 걷다보면 스쳐 지나가게 된다. 행정적으로 삼청동의 일부로 관리되지만 엄연히 이름이 다른 동네이다. 8일 오후 소격동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 ‘나 그대와 둘이 걷던 그 좁은 골목계단을 홀로 걸어요’라는 말로 시작하는 가수 서태지의 소격동 노래가 인기입니다. 기억 속에 아릿하게 남아 있는 소격동에 대한 추억과 엄혹했던 80년대의 사회상을 은유적으로 잘 담아낸 곡이라는 평가입니다. 서태지는 “소격동을 기억하나요. 아직도 그대로 있죠”라고 노래했지만 실제 소격동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소격동에 아직도 살고 있는 사람들과 변해가는 거리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4·19땐 개천 돌멩이에 학생들 피가 묻어있었지”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택시기사에게 ‘소격동으로 가주세요’라고 요청하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격동은 서울 한가운데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소격동 사건’(1980년대 국군기무사가 학원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6명이 의문사한 사건) 따위로 인구에 회자된 적이 몇 번 있을 뿐이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이 가수 서태지(42)의 신곡 발표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연일 인터넷 검색 순위 상위권에 오르내린다. 사람들은 대체 소격동이 어디냐며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미 가봤지만 소격동인지 모르고 지나친 사람들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서태지가 다시 오면 놀라려나
소격동은 서울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작은 동네다. 아래로는 사간동, 오른쪽으로는 화동, 위로는 팔판동을 이웃으로 한다. 행정적으로는 삼청동의 일부로서 관리된다. 그래서 소격동이 궁금하면 소격동 주민센터가 아닌 삼청동 주민센터를 찾아야 한다. 소격동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삼청동 골목으로 알고 걷는다.
8일 소격동을 찾았다.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찾아가는 게 제일 가깝고 편하다. 지하철 출구를 나와 몇 발자국 걸으면 풍문여자고등학교 정문과 옛 미국대사관 터 사이를 가로지르는 폭 8m의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소격동 쪽으로 오르면 고풍스러운 담벼락과 운치 있는 거리 풍경에 눈이 따스해진다. 5분 남짓 걸으면 안동교회 입구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부터 왼쪽이 소격동, 오른쪽이 화동이다. 정독도서관 앞 사거리에서 경복궁 방향의 길을 따라 걸어가도 소격동이다.
소격동 이름의 유래는 소격서라는 관청과 관련 있다. 소격동에 소격서가 있었다. 조선시대 국가적인 제천의식 등 도교의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이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기에 유생들은 소격서의 폐지를 끊임없이 주장했고, 소격서는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됐다. 소격서는 소격동이라는 동네 이름에 흔적으로만 남게 됐다.
가수 서태지는 유년기에 이곳 소격동에서 살았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소격동에 함께 살았다는 게 동네 주민들의 설명이다. 어떤 주민은 서태지가 살던 집이 지금의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뒷골목쯤이라고 설명하는데 정확히 확인할 순 없었다. 서태지가 갈수록 책보다 기타를 좋아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가 기타를 여러 번 부쉈는데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서태지 아버지를 잘 아는 동네 한 주민의 설명이다.
서태지는 유년 시절의 소격동을 그리워한 걸까. 그가 ‘소격동’이라는 노래를 발표했지만 다시 이곳을 들른다면 변해버린 동네 풍경에 놀랄 것이다. “소격동을 기억하나요, 지금도 그대로 있죠”라는 노랫말은 어쩌면 현실이 아니라 소망일지도 모른다. 낡고 구불구불한 모양의 골목과 한옥은 여전하지만, 아기자기한 카페와 상점들이 뒤덮은 지 오래다. 약 10년 전부터 관광지처럼 변하기 시작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주민들은 아쉬워한다. 유년 시절 추억이 동네 곳곳에 배어 있는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소격동 37번지에는 ‘소격동 37번지’라는 이름의 식당 주인 이서영(44)씨가 살고, 일하고 있다. 이씨가 살던 2층짜리 흰색 벽돌 양옥집은 2년 전부터 식당으로 변했다. 저녁 손님을 맞기 위해 부엌에서 만두를 빚던 이씨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여기서 살았어요. 원래는 밤에 잠옷 입고 산책 다녀도 되는 조용한 주택가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곳에 화랑이 들어서고 상점들이 생기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니 관광지가 되어버렸어요. 결국 우리 집도 개조해서 식당을 하고 있네요.”
이씨는 소격동의 흔적을 가게에 남기고 싶었다. 도로명 중심으로 바뀐 새 주소는 ‘삼청로 2길 29-1’이지만 소격동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외국에선 길을 중심으로 주소를 만들지만 저는 소격동이라는 이름을 버리기 싫었어요. 소격동이란 말이 정말 좋아요.”
소격동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소격동을 몰랐던 이들도 이곳을 알게 되는 것 같아 이씨는 위안을 받는다. “(소격동 음원이 인터넷에 공개된) 10월2일 이어폰을 귀에 꽂은 여고생이 ‘여기가 소격동이냐’면서 찾아와 밥을 먹고 가더라고요. 서태지 음악을 듣고 소격동이 어딘지 너무 궁금해 찾아왔다고 해요.” 그날 이후 소곤소곤하며 이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기무사 담벼락에 둘러싸인
군사정부 권력의 뒤켠에서도
소격동 사람들은 꿋꿋했다
툭하면 신분증 검사를 당했고
세탁소 주인은 군복을 다렸다 사람들이 떠나 인구는 216명
좁은 골목길과 낡은 한옥집은
카페와 화랑으로 바뀌었다
서태지 노래 듣고 찾는 이들이
소격동의 과거를 되새긴다 관광객 담배꽁초 줍는 게 일상 이건선(74)씨는 1953년부터 소격동에서 살아온 주민이다. 그는 “소격동 앞 개천에서 목욕도 하고 가재랑 물방개 잡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주민 김정배(75)씨는 “4·19 때 개천의 돌멩이에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 개천(중학천)은 눈에서 사라졌다. 서울시는 경복궁 동쪽 담벼락과 소격동 사이 왕복 6차선 도로 밑으로 개천을 묻어버렸다. 북악산에서 흘러나온 이 물은 원래 청계천으로 이어졌다. 삼청로 도로명을 지정한 ‘서울시 고시 제1039호’를 보면, 개천은 1966년께 도로 밑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서태지가 태어나기 6년 전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많던 냇물이 말라갔죠”라는 소격동의 노래 가사는 서태지의 어린 시절 기억이라기보단 어른들이 전해준 소격동의 추억인 것 같다.
소격동의 주민 수는 10월 현재 216명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이 이곳저곳으로 많이 떠나버려 인구가 많이 줄었다. 원래 소격동은 시골 마을 정서가 넘치던 곳이었다고 한다. 소격동에서 통장 일을 보고 있는 장주희(63)씨는 “가족처럼 정을 나누며 지낸” 소격동의 공동체가 갈수록 붕괴되는 것 같아 아쉽다.
“이웃이 집 앞을 지나가면 ‘언니 이리 와’ 하고 불러서 같이 커피도 먹고 감자도 삶아 먹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웃이 없어져 우울증 걸릴 거 같아요. 다들 집을 팔고 많이 나가버린데다, 어르신들도 하나둘씩 돌아가고 계세요.”
소격동은 갈수록 사람 살기 불편해지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꼭 필요한 시장이 없고, 이발소가 없고, 약국과 문구점도 없다. 아니, 없어졌다. 노천 카페들이 소격동의 주인 행세를 한다. 관광지이기 이전에 사람 살던 동네였다는 것은 잊혀지고 있다.
동네의 변화를 알아챈 눈치 빠른 기업가들은 야금야금 소격동의 땅과 건물들을 사들이고 있다. 자본 조달력이 떨어지는 주민들은 집을 고쳐 번듯한 가게를 열기 어렵다. 소격동 곳곳에 들어서는 화려한 화랑들과 각종 상점들은 실제로는 외지인이 사들인 것이 태반이다. 소격동 주민들의 살림집은 점점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 ‘관광지 액세서리’처럼 전락해가고 있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와 담배꽁초 줍는 게 일상이에요.” 장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업화에 치여 살기 전 소격동 주민들은 군사시설에 치여 살던 시절도 있었다. 소격동 터의 절반을 국군기무사(전 보안사령부)가 오랫동안 차지해왔다.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회색빛 기무사 담벼락은 주민들이 안고 살아야 하는 우중충한 숙명 같은 존재였다.
소격동에서 ‘라디오엠’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강동주(44)씨는 “기무사 담벼락에 둘러싸인 소격동 골목은 죽은 길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군사정권 시절 소격동 주민들은 길을 가다 툭하면 신분증 검사를 당했고, 그래도 주민들이 미덥지 못한 경찰은 집까지 찾아와 진짜 소격동 주민인지 확인한 뒤 돌아가곤 했다.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라 불안했는지 늘 국민들 감시하느라 바빴지….” 한 주민이 과거를 회상하며 혀를 찼다.
서태지의 유년 시절은 군사정권의 이런저런 폭력에 숨죽이며 살아가야 했던 소격동 주민들의 아픔과 자연스럽게 함께한 것일까. 소격동 뮤직비디오에는 기무사에 끌려간 한 소녀의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면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은 어린 서태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삭막했던 소격동은 이제 예술이 숨쉬는 동네로 거듭나고 있다. 기무사가 2008년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한 자리에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섰다. 과천의 현대미술관 일부가 이곳 소격동으로 대신 올라온 것이다. 소격동에는 90년대 후반부터 각종 아트센터와 화랑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에 미술관이 들어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관료들이 ‘이제부터 이곳은 예술의 전당이다’라고 선언한 뒤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놓으면 그곳이 갑자기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던 시절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 같다.
다만 소격동 현대미술관 터를 둘러보자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술관은 옛 기무사 본부의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중심 건물로 삼았다. 기무사 건물은 원래 일본군 수도육군병원으로 1913년 지어졌다. 근대문화재라서 건물 해체보다는 재활용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에 포스트모던한 느낌의 현대식 건물을 이번에 새로 이어붙였다. 미술관 뒤편 마당에는 과거 종친부(조선 왕실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 복원돼 있다. 이 때문에 중세, 근대, 현대의 건물들이 좁은 터에 뒤죽박죽 엉켜 있는 느낌이 든다. 종친부 관청 터에 이질적인 근대식 3층 벽돌건물을 세운 일제와 또한 그곳에 포스트모던한 느낌의 미술관을 이어붙인 지금. 소격동은 관리 주체가 누군지에 따라 이런저런 헝겁을 이어붙인 낡은 옷처럼 변해간 걸까.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 미술관 뒤 얕은 구릉에서 인왕산 자락을 살펴보는데 미술관의 너른 마당을 뛰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귀를 간지럽혔다. “동네에서 아이들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졌다”는 소격동 주민들의 푸념이 떠올랐다. 미술관과 함께 소격동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따라온 것 같아 귀가 즐겁다.
‘쪼인트 까인’ 장군들이 찾던 세탁소
소격동의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니 파랗던 하늘에 어느새 어스름이 짙어갔다. 미술관 뒤편 골목길에 작은 세탁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2층짜리 허름한 건물의 1층이 세탁소다. 세탁소 주인(64)은 열심히 양복을 다리고 있었다. 그는 1974년부터 이곳에서 일해왔다. 기무사 담벼락 바로 옆의 구멍가게만한 크기의 세탁소는 그의 평생의 일터였다. 주인에게 말을 붙여봤다.
“기무사가 소격동에 있을 때 ‘쪼인트’ 까인 장군들이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제게 와서 많이 얘기하고 갔지요.” 그가 씨익 웃었다. 주인은 곧 세탁소를 폐업한다고 말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기무사 내 병동에 실려왔을 때도 손에서 다리미를 놓지 않았고, 기로에 선 현대사의 주인공들이 기무사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 순간순간에도 그는 손에서 다리미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세탁소를 찾는 이가 없어져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
주요 고객이던 기무사의 군인들이 사라졌고 소격동 주민들도 하나둘 떠나버린 지 오래다. “매일 사람들이 찾아와 카페로 바꾸자고 바람을 넣네요. 어떡하겠어요.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애써 웃음짓는 세탁소 주인의 얼굴에서 복잡한 심경이 읽힌다.
노래 ‘소격동’에서 서태지는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라고 읊었다. 어린 서태지도 분명 이 세탁소를 오며 가며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교복도 이곳에서 다림질되었을지 모른다. 소격동에 하나 남은 이 세탁소의 허름한 불빛은 언제까지 밝혀질 수 있을까. 가을밤의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아득한 대답처럼 소격동의 골목에 내려앉았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서태지 버전 ‘소격동’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서태지컴퍼니 제공
소격동 국군기무사 자리에 들어선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에는 아직 한옥들이 제법 남아 있다.
군사정부 권력의 뒤켠에서도
소격동 사람들은 꿋꿋했다
툭하면 신분증 검사를 당했고
세탁소 주인은 군복을 다렸다 사람들이 떠나 인구는 216명
좁은 골목길과 낡은 한옥집은
카페와 화랑으로 바뀌었다
서태지 노래 듣고 찾는 이들이
소격동의 과거를 되새긴다 관광객 담배꽁초 줍는 게 일상 이건선(74)씨는 1953년부터 소격동에서 살아온 주민이다. 그는 “소격동 앞 개천에서 목욕도 하고 가재랑 물방개 잡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주민 김정배(75)씨는 “4·19 때 개천의 돌멩이에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 개천(중학천)은 눈에서 사라졌다. 서울시는 경복궁 동쪽 담벼락과 소격동 사이 왕복 6차선 도로 밑으로 개천을 묻어버렸다. 북악산에서 흘러나온 이 물은 원래 청계천으로 이어졌다. 삼청로 도로명을 지정한 ‘서울시 고시 제1039호’를 보면, 개천은 1966년께 도로 밑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궁 인근이라 증축의 규제를 받아 1층 집들이 많다.
주택가에서 10년 사이 관광지로 변모해 북적인다.
삼청로보다 소격동이라는 이름을 주민들은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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