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근은 형제복지원이 최고의 부랑인 수용 시설임을 보여주기 위해 회고록에 원생들과 각종 시설 사진을 실었다. “여자결핵요양원 병실. 흉측한 몰골의 사람들 모습입니까?” 그가 기록한 사진설명이다. 그 외에 정부 관계자들이 시찰을 나온 사진 등이 회고록에 수록됐는데 사진설명이 선전 일색이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제공
황제는 귀환했다. 박인근은 1989년 7월 출소 후 곧바로 재단의 이름만 세탁한 ‘재육원’의 이사장이 되었다. 부산시는 이 과정에서 형제복지원의 법인명 변경 등을 허락해주었다. 국가는 그의 화려한 귀환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박인근은 2003년 부산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복지시설 원장들의 충성심은 박인근의 구속과 수감, 언론의 비판에도 사그라들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이사장으로 복귀한 박인근은 1991년 3월1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탄받은 것이 가슴 아프다”며 사건 당시를 회상했다. “비록 죄가 있다고 벌을 받긴 했지만 양심적으로 시설 운영을 위해 헌신적인 일을 했는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어요. 원생들도 언제나 사랑으로 이끌었는데 혹사 감금 폭행 치사 등 온갖 나쁜 죄는 다 뒤집어쓴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경향신문>은 인터뷰를 실으면서 박인근에 대해 다소 애매모호하게 평가했다. “그의 잘못도 크지만 공로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시민의 여론도 자못 높게 일고 있지만 그가 형벌을 받기까지엔 상당한 잘못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박인근과 김용원 검사의 악연은 23년간 지속됐다. 김용원 검사는 변호사로 개업한 뒤인 1993년, 즉 박인근이 구속된 지 6년이 지나 형제복지원 수사 과정 등을 담은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를 발간했다. 박인근이 김용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혐의 없음’으로 끝났다. 박인근은 받은 굴욕을 잊지 않고 설욕전을 준비했다. 김용원의 책이 나온 지 17년 뒤인 2010년, 박인근은 형제복지원 수사 과정의 인권 침해와 부당함에 대해 기록한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를 펴냈다. 1885쪽짜리 회고록에는 이렇게 써 있다.
“아내의 권유로 김용원 전 검사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용서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제가 부족함으로 여기고 용서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2년6개월간의 형무소 생활을 마치고 출옥을 할 때도 원망 대신 기쁜 마음이 있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지내는 동안 앞으로의 생활을 구상하면서 대한민국에 거지가 없는 나라, 노숙자가 없는 나라, 젊은 사람이 직업 없이 행패 부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마음을 먹었습니다.”(258쪽)
“김용원 검사가 형제복지원으로 들어왔을 당시 그때에는 이미 모든 공사를 완공하고 설립 당시에 비해 너무도 멋있는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401쪽)
“대한민국 사회복지시설에서 식사를 자유 배식에 1식5찬과 잡곡으로, 부식에는 호주산 갈비짝을 4톤 트럭으로 구입하여 곰탕을 만들어 제공하였으며 충무동 수산센터에서 고등어를 구입하여 부랑인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수용자들의 급식이 대한민국에서 제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식탁 위에는 간장에 초를 혼합하여 설탕으로 간을 한 ①초간장 통 ②고추장 통 ③다시다 통 ④맛소금 통 이렇게 4가지 양념통이 배치되어 있어 부식이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맛있게 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213쪽)
“요즘 들어 가끔 서울역, 구포역, 부산진역, 영등포역 등을 돌아볼 때 눈에 띄는 부랑인을 볼 때에 이 모든 것이 김용원 전 검사의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진실을 규명할 것입니다.”(313쪽)
“정부에서 내무부 훈령 410호를 폐지하였던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사회에 부랑인들을 조직화되게 하였고 노숙자들이 노숙 장소 등을 찾아다니며 생겨난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형제원 수용자 간부들은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출신들을 찾아가서 좋은 정보를 주고 옛날 형제원 시설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현실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442쪽)
이 책을 펴낼 당시 81살의 노인 박인근은 복지원 원장으로서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1980년대에 여전히 정지돼 있었다. 박인근이 구속과 재판, 출소와 재기를 반복하는 사이 형제복지원에 감금됐던 원생들의 삶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여덟 채식은 형제복지원을 나온 뒤에도 경찰관만 봐도 자신을 잡아갈까봐 뒷걸음질을 쳤다. 열여덟 상명은 복지원을 나와 부산 나이트에서 일하며 업소 일이 끝나면 나이트 정문 앞에서 잠을 잤다. 상명은 사는 것이 힘들어 소주를 마시면 손목에 칼을 긋곤 했다. 어른이 된 태길은 부산 영도구 영선동 미니아파트 뒷산에서 나무에 목을 매었다가 다음날 깨어났다. 자살은 실패했다. 시간은 흐르고 손목에 그은 칼과 목을 조이던 줄의 자국은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만은 선명히 남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이들의 슬픈 운명을 국가는 잊으려 했다. 진실은 지금, 여기에 멈추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제3부에서는 박인근 일가의 재산 문제와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 및 해결 방안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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