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형제복지원에 수용할 것을 의뢰한 사람들. 박인근은 회고록에서 이들을 ‘재건단(넝마조직) 똘마니’라고 표현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제공
국가는 도망치기에 바빴다. 박인근 원장이 구속되고 형제복지원에 대한 관리 책임이 불거지자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에, 부랑인을 잡아들이도록 훈령을 만든 내무부는 보사부(보건복지부)에 책임을 미뤘다.
“내무부 간부들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자 한마디로 보사부 소관 업무라며 남의 일처럼 대하면서도 사건 내용과 파문으로 봐서 김주호 부산시장이 인책되지 않겠느냐고 한마디씩.
이들은 평소 부산시가 내무부에 대해서까지도 고자세를 보여온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번 사건이 왜 터졌는지 알 만하다며 김주호 시장이 농수산부 출신으로 일약 경남지사에 발탁됐다가 아무 지연도 없는 부산시장 자리로 바로 옮겨 앉게 돼 지역 사정과 시정 업무 장악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등 하나같이 비판.”(<동아일보> 1987년 2월6일치)
보사부 또한 부산시에 책임을 미뤘다. 이해원 보사부 장관은 비판이 잇따르자 박인근이 구속된 지 2주일이 지난 2월4일 복지시설 관리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그는 사건 초기에 사태를 관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운영 실태는 해당 시·도가 제일 잘 아는데 중앙부처에서 사건이 터진 뒤 직접 조사에 나서거나 이래라저래라 따지고 간섭하면 일이 더 안 될 것 같아 부산시가 사후 수습을 하라고 일임했습니다.”(<경향신문> 1987년 2월5일치)
보사부는 2월6일 밤 10시께 국회 보사위 소속 가운데 집권 여당인 민정당과 국민당만 참석한 간담회에서 7쪽짜리의 보고 자료를 발표했다. 수용 절차, 폭행과 강제노역, 감독 부재, 사체 처리, 원장의 비리는 한 줄도 언급되지 않은 부실 발표였다.(<동아일보> 1987년 2월7일치) 이해원 장관은 “사건은 조용히 진상이 규명돼야 하며 박인근 원장이 의욕적으로 일하다 보니 터진 사건”이라고 설명했다.(<동아일보> 1987년 2월11일치)
여당 의원들조차 이해원 보사부 장관에게 소리를 치며 호통을 쳤다. 간담회는 아수라장이 됐다. “장관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겁니까!” “이런 자료를 갖고는 따질 가치도 없어요.”
야당인 신민당은 이날 간담회에 불참했다. 신민당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여당의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소집을 국민의 이름으로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부산시는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부산시는 형제복지원에 대한 시장의 해명 기자회견에 중앙지 기자들의 취재를 막았다. 박인근이 불법 목장지를 조성하고 감금된 원생들을 구타하며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경남 울주군은 검찰의 수사 발표가 사실무근이라고 경남지사에게 허위 보고를 했다.
부산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비영리 법인 형제복지원은 전체 예산의 80%를 국고 및 시비에서 지원받고 있으면서도 관리는 허술했다. 복지원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구청의 주사보 1명이 사실상 형제복지원 관리를 맡았다. 부산 주례동에 있는 형제복지원의 관할 관청인 북구청 총구국장 이아무개씨는 박인근으로부터 65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들 간의 돈거래가 대여 형식으로 이뤄진 것은 밝혀냈으나 뇌물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내무부 훈령에 따르면 파출소장이 1주일에 한번 부랑인을 보호한 시설을 순찰해야 한다고 되어 있으나 형제복지원에 대한 순찰은 한차례도 없었다. 형제복지원 관리부장 손이선씨는 신민당의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조사단(단장 문정수)에 “10년 동안 한번도 감사를 받아본 적 없다.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처리해왔다”고 털어놓았다.
신민당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진상조사단(단장 문정수)은 1987년 1월29일부터 2월1일까지 조사한 1차 보고서를 당에 제출했다. 보고서에 기록된 인권 유린과 사망 과정은 잔혹했다.
“근신 소대라고 불리는 특수 내무반이 있는데 여기 수용되면 40㎏ 이상의 모래주머니를 지고 돌 깨기, 철근 작업, 축조에 동원된다. 건물 뒤쪽 별채에 말 안 듣는 사람만 감금하는 독방이 있는데(약 20개) 여기 수용되면 꿇어앉아 잠을 자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신질환자를 수용할 때 정신과 의사 2명의 진단과 경찰의 입회하에 입소하게 되어 있으나 요양자 70% 이상이 변칙적으로 수용된 정상인으로 파악됐다. 의료 시설은 전혀 없었고 치료 방법은 하루 3~4회 신경안정제를 투입해 요양자 대부분이 중독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양소영씨는 86년 7월 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소대장 임정한에 의해 구타 중 사망했다. 온몸을 덮는 이른바 우주복을 입고 침대에 묶인 채 이불에 덮여 구타, 질식사했다. 그러나 형제원에서 발간하는 새마음(87년 1월)지에 실린 86년 사망자 명단에는 양소영씨가 빠져 있었다.”
국가는 부랑인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떠도는 국민을 배제하고 이들의 감금을 사실상 합법화했다.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도 단속과 보호를 명목으로 ‘부랑인’을 강제 수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내무부 훈령 410호가 정의한 부랑인은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자”였다.
부랑인에 대한 감금은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도시 정화를 목적으로 강화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4월 올림픽 개최 확정을 5개월 앞두고 지휘 서신을 내린다. “총리 귀하, 별첨 정보보고서와 같이 근간에 신체 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 부처 협조 하에 일절 단속 보호 조치하고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1981년 4월부터 1만명이 넘는 공무원이 부랑인 단속에 투입되었고 그해 9월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자 정부는 추가 실태 조사와 대책을 마련했다. 1981년 8605명이던 부랑인 수용 인원은 1986년 1만6125명으로 증가했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은 부랑인 수용 실적이 높은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에게 국민훈장을 내렸다. 내무부 훈령 410호는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1987년 2월16일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훈령 410호는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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