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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 제1회 ⑨ 선옥이

등록 2014-08-29 20:47수정 2014-09-02 16:28

1992년 어느 밤 태길은 부산 길을 헤맸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보름씩 잠을 자며 고등어나 조기를 잡았다. 뱃사람 태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생선들이 배 위에 실렸다. 바다와 물고기는 태길에게 과거를 묻지 않았다. 태길이 육지에 돌아올 때면 맞고 때리고 피 흘리며 사라진 사람들, 갇혀 살던 시절의 기억이 밀려왔다.

그날 밤 태길은 간절하게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여자 생각이 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범천동 대양고무 공장 근처의 큰길가 양쪽으로 술집 4, 50개가 모여앉아 불빛을 번쩍였다. 술에 취한 남자들은 걸음을 멈추고 싸고 허름한 술집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다.

바다에서 부산으로 돌아온 태길은 그날 밤 범천동 술집 거리를 쏘다녔다. 한 상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사동 그 사람.’ 가수 주현미의 노래 제목이다. 태길은 문을 열고 ‘신사동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아가씨 한명이 따라 나온다. 한눈에 보아도 선술집에 있기에는 아까운 미인이다. 아가씨가 태길의 옆자리에 앉아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가씨, 내 이야기 좀 들어 볼라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태길은 처음 보는 아가씨에게 복지원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가씨는 아무 말이 없다. 이야기는 길어지고 술잔에 들이붓는 술은 많아졌다.

“내가 거기 복지원 야간중학교를 다녔거든.”

말없이 듣고 있던 아가씨는 태길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야, 선옥이. 나 모르겠어?”

“선옥이?”

태길은 짙은 화장을 한 아가씨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형제복지원에서 함께 야간중학교를 다니던 선옥이였다. 중학교 1학년 여학생 8명 가운데 가장 예뻤던 선옥이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한번씩 짝사랑했던 여자였다. 어린 태길도 말 한번 붙이지 못했지만 선옥이를 좋아했다. 술기운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태길은 선옥을 보자 이상하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복지원을 뛰쳐나와 섬에 끌려갔고 사람 아닌 노예로 살았다. 가족들과도 인연을 끊었다. 마음에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머리에 고통의 기억이 밀려올 때면 혼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술을 들이부었다.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마음껏 울어본 적이 없었다. 태길이 엉엉 울자 선옥도 따라 울었다. 두 사람은 그날 밤이 지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껴안고 울다 이야기하다 다시 술을 마셨다.

그날 이후 바다에서 보름씩 물고기를 잡고 부산으로 돌아오면 선옥의 술집을 찾았다. 술집을 나와 선옥의 손을 잡고 거리에서 데이트를 했다. 영화를 보고 서면 태화백화점에서 선옥에게 새 옷을 입혀 주었다. 선옥을 만나던 어느 날, 태길은 여관에 가자고 했다. 선옥은 거절했다. 선옥에게 술집을 그만두고 함께 살자고도 했다. 달세방을 하나 구할 테니 술집 일을 그만두고 고기 잡아 번 돈으로 다른 부부들처럼 살자고 했다. 선옥은 태길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한동안 바다에 나간 태길이 부산으로 돌아와 다시 술집을 찾았다. 바다에서도 선옥이 생각에 일이 고되지 않았다. 어디서 데이트를 할까 생각하니 심장이 설렜다. ‘신사동 그 사람’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선옥이 없다. 주인은 선옥이 남긴 쪽지를 전해 주었다.

‘복지원에서 당했던 일들 때문에 오빠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오빠를 좋아하지만 떠날게.’

술집 주인은 태길에게 쪽지를 주며 선옥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옥은 술집 손님들이 몸에 손을 대면 다른 아가씨들과 달리 유달리 예민하게 굴며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 술집에 정착하지 못하고 범천동 술집 일대를 거의 전전했다고 했다. 이번엔 어느 술집으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태길은 짐작이 되었다. 예쁘장한 여자애들이 소대장한테 성폭행을 당했다던 얘기, 임신했다가 낙태가 됐다는 이야기는 복지원 어느 곳에서도 쉽게 들리던 소문이었다. 태길은 선옥이 왜 여관으로 가길 거부했는지, 남자들이 손만 대어도 예민하게 굴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함께 여관으로 가려던 그날 일이 후회되었다.

태길은 그날 밤 선옥이 남기고 간 쪽지를 손에 쥐고 ‘신사동 그 사람’을 나와 거리를 헤맸다. 같은 기억을 가진 채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던 선옥이 꿈같이 사라졌다.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엉망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태길은 다시 반길 곳 없는 길 잃은 개가 되었다. 완벽한 혼자다. 술집의 불빛들과 거리를 달리는 차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사이로 태길이 홀로 걸어 들어갔다. 깊은 밤 달은 위로하지 않았다. 태길은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선옥아, 잘 지내냐? 여자는 계속 말이 없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제2부에서는 내무부 훈령 410조를 통해 거리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도록 정당화한 국가의 폭력과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씨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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