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박인근이 한순간 사라졌다. 1987년 1월16일이다. 성주가 증발한 복지원은 혼란에 휩싸였다. 무자비한 권력자가 사라진 공간에 곧바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복지원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고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용자들을 사회는 불안해했다. 자유는 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검찰에 끌려간 원장 박인근은 다음날 구속되었다. 박인근이 울산에 짓고 있던 자동차 교습소 건설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검찰 수사로 원장은 붙잡혀 들어갔다. 원장실 대형 금고에서는 22억원의 예금 증서와 달러, 엔화가 쏟아졌다. 이 돈과 예금 증서는 압수되었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이 복지원에 들어와 실태 조사를 하였다. 장시간 가두어진 사람들은 쉽게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하거나 말하기를 주저했다.
맞아 죽은 마흔살 수용자 김계원의 죽음은 검찰 수사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1986년 8월2일 탈출을 시도했던 김계원은 발각되어 다른 수용자들이 보는 데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태길과 은영의 소대장이었던, 여자아이들의 살결을 만지곤 하던 충식은 몽둥이를 들고 김계원의 몸을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김계원은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찬물을 들이부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숨을 멈추었다. 복지원 촉탁 의사 정명국은 김계원의 죽음을 신부전증으로 인한 사망으로 처리했다. 소대장 충식은 검찰 조사에서 “김계원이 쓰러지자 원장 박인근에게 보고했고, 이후 원장에게서 김계원이 사망했음을 듣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한동안 신문과 방송은 복지원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복지원생 강제노역 폭행치사 원장 등 5명 구속’ ‘공포의 복지원 12년, 원생 513명 병사’ ‘원생 사망 허위진단서 복지원 사건 의사 입건’ ‘부산 복지원 사건 신민 조사단 파견’ ‘복지원 사건 국회서 다뤄야’ ‘살상원이 된 복지원’ ‘국민훈장 받은 평통위원 박인근은 누구인가’ ‘행정 부처끼리 책임 회피’ ‘대공 관계 혐의자도 일부 수용, 사체 의학 실험용 판매 가능성’ ‘부산시 복지원 사태 터지자 은폐로 일관’.
언론은 기사 경쟁을 하며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녔다.
“85년 5월16일 울산시 학성동 소재 학성공원 부근에서 약취된 김진희양은 울산역에서 부산진역으로 옮겨졌다. 부산진역 부근에서 성명 불상의 여자에게 인계돼 그 집에서 4일간 식모살이 중 부모가 보고 싶다고 울자 매질하여 그 집에서 도망을 나왔다. 진희양은 밤새 배회를 하다가 다시 파출소에 인계되었고 경찰은 형제복지원에 보냈다. 진희양은 집 주소를 몰랐지만 소속 초등학교 선생 앞으로 편지를 썼다. 수용소에서 우편을 보내지 않아 수용생활을 이어갔다. 진희양의 아버지 김무송은 85년 10월 형제복지원에 찾아갔으나 경비원이 제지하여 딸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신문들은 점차 흥미를 잃었다. 1987년 여름, 전국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서울대 학생 박종철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숨지자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고 독재 타도를 외쳤다.
민주화의 깃대조차 되지 못했던 복지원의 감금자들은 잊혀졌다. 박인근의 성 안에 갇혀 살았던 태길과 은영은 거리로 나왔다. 11년간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할 바 없는 513명의 사망자들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잊혀졌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