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길씨가 어릴 때 살던 부산 영도구 영선동 미니아파트 창밖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1978년 건축된 미니아파트는 부산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 가운데 한 곳이다. 부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때려.”
여자 아동 소대에 신입 아이가 한명 들어왔다. 은영이 몇 달 전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울며 내보내 달라고 떼를 쓴다. 아직 형제복지원이 어떤 곳인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다. 작고 힘없는 은영에게 조장 엄기자가 명령한다. “저 애 때리라고.”
은영은 주춤거리며 주먹을 들지 못했다. 복지원에 들어오기 전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린 적은 없다. 저 아이를 왜 괴롭혀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개새끼.” 덩치 큰 조장 엄기자가 은영에게 성큼 다가와 손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때리라고. 이년아.” 머리에 불꽃이 일며 머리가 후끈거린다.
열살 은영은 맞아 부은 얼굴로 울부짖는 아이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맞지 않기 위해선 때려야 한다. 아이가 더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국방색 모포 속 아이는 처음 복지원에 와서 내보내 달라던 은영의 과거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람을 때리는 일이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신입 소대원이 들어와 서럽게 울고 발버둥 칠 때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함께 국방색 모포를 뒤집어씌우고 주먹과 발로 때렸다. 처음 들어왔다고 우는 아이들은 가엾지 않고 시끄럽게만 보였다. 동정이나 자비, 공감, 이해, 용서 같은 감정들은 복지원에서 순식간에 기화되었다. 조그만 자극에도 분노와 증오가 타올랐다.
열살 은영은 맞아 부은 얼굴로
울부짖는 아이의 뺨을 때렸다
맞지 않기 위해선 때려야 한다
아이가 더 크게 울부짖는다
그 아이는 은영의 과거였다 성주이던 박인근이 잡혀갔다
1987년의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민주화의 깃대조차 되지 못했던
복지원의 감금자들은 잊혀졌다
태길도 겨울에 복지원을 나왔다 우리들은 모두 홀로였다. 어둡고 깊은 계곡 사이를 쫄쫄거리며 흘러가다 손바닥만한 흙바닥으로 모이면 스며들고 마는 한 줌 물이었다. 우리는 댐이나 저수지로 모여들지 않았기에 위험하지 않은 존재였다. 우리들은 타인과 비밀을 공유하기 어려웠다. “외부인한테 쓸데없는 말 하면 죽는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도록 강요받았다. 외부 손님이 다녀갈 때나 복지원 내 야간중학교나 개금 분교에 다니는 아이들한테는 늘 그런 지시가 있었다. 여자 아동 소대의 한 아이는 분교 선생님에게 집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했다가 소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편지를 전하는 장면이 또 다른 학생의 눈에 포착되었고 금세 소대장에게 보고되었다. 은영이 속한 소대는 밤새 기합을 받았다. 편지를 주는 걸 본 또 다른 아이가 있느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협박과 위협이 반복됐다. 소대장에게 고자질을 한 아이만은 체벌을 받지 않고 편하게 앉아 있다. 은영은 고자질을 한 아이만큼 부모에게 편지를 전달하려 한 아이도 미웠다. ‘조용히 살 것이지.’ 우리들은 수용자 번호나 별명으로 불리어졌다. 제대로 된 이름은 갖지 못했다. 도망을 치거나 죽으면 명단에 줄이 그어졌다. 복지원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탈출자가 있는지 인원을 점검했다. 매년 복지원 인원은 증가했다. 1975년 12월 516명이던 수용자는 816명, 1111명, 1325명, 1293명, 1221명, 1713명, 1985명, 2525명, 2861명, 3011명으로 매년 증가했다. 86년 말에는 수용자가 3128명이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12년간 513명이 숨졌다. 사실 누구도 검증하지 못한 장부상의 숫자다. 형제복지원 꼭대기에는 작은 무덤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누군가는 이 무덤 속에 수용자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죽어서도 가족들이 찾지 못할 것이며 이 공간에서 벌어진 감금과 학대를 알릴 수 없다. 나간다고 해도 부랑자로 낙인찍은 시선들이 우리들이 당한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철창 밖 사람들이 탄생과 동시에 매우 느린 속도로 사망에 다가서는 그 시간에 우리는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외부 병원으로 나가는 절차는 까다로웠다. 운동장에서 숨이 넘어가려는 한 할머니는 들것에 실려 있었다. 복지원 관리자들은 외부 출입을 시키느니 마느니 옥신각신했다. 할머니는 결국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회 병원으로 보냈다가 도망을 치는 사례가 생기자 외부 병원으로 가는 조건은 점차 까다로워졌다. 의사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간호사 자격증도 없는 복지원의 아이들이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찢겨진 부위를 찢고 실로 깁고 소독했다. 정신과 병동은 비밀스러웠다. 가짜 외과 의사나 간호사 노릇을 하며 병동을 관리하던 수용자들도 정신과 병동에는 들어갈 수 없다. 누가 사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복지원 내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면 창문 너머로 정신과 병동 내부가 보였다. 한 여자가 그곳에 있다. 벌거벗은 젊은 여자가 침대에 묶여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고함을 친다. 누구도 듣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 여자는 늘 그랬다.
울부짖는 아이의 뺨을 때렸다
맞지 않기 위해선 때려야 한다
아이가 더 크게 울부짖는다
그 아이는 은영의 과거였다 성주이던 박인근이 잡혀갔다
1987년의 대한민국은 뜨거웠다
민주화의 깃대조차 되지 못했던
복지원의 감금자들은 잊혀졌다
태길도 겨울에 복지원을 나왔다 우리들은 모두 홀로였다. 어둡고 깊은 계곡 사이를 쫄쫄거리며 흘러가다 손바닥만한 흙바닥으로 모이면 스며들고 마는 한 줌 물이었다. 우리는 댐이나 저수지로 모여들지 않았기에 위험하지 않은 존재였다. 우리들은 타인과 비밀을 공유하기 어려웠다. “외부인한테 쓸데없는 말 하면 죽는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도록 강요받았다. 외부 손님이 다녀갈 때나 복지원 내 야간중학교나 개금 분교에 다니는 아이들한테는 늘 그런 지시가 있었다. 여자 아동 소대의 한 아이는 분교 선생님에게 집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했다가 소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편지를 전하는 장면이 또 다른 학생의 눈에 포착되었고 금세 소대장에게 보고되었다. 은영이 속한 소대는 밤새 기합을 받았다. 편지를 주는 걸 본 또 다른 아이가 있느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협박과 위협이 반복됐다. 소대장에게 고자질을 한 아이만은 체벌을 받지 않고 편하게 앉아 있다. 은영은 고자질을 한 아이만큼 부모에게 편지를 전달하려 한 아이도 미웠다. ‘조용히 살 것이지.’ 우리들은 수용자 번호나 별명으로 불리어졌다. 제대로 된 이름은 갖지 못했다. 도망을 치거나 죽으면 명단에 줄이 그어졌다. 복지원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탈출자가 있는지 인원을 점검했다. 매년 복지원 인원은 증가했다. 1975년 12월 516명이던 수용자는 816명, 1111명, 1325명, 1293명, 1221명, 1713명, 1985명, 2525명, 2861명, 3011명으로 매년 증가했다. 86년 말에는 수용자가 3128명이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12년간 513명이 숨졌다. 사실 누구도 검증하지 못한 장부상의 숫자다. 형제복지원 꼭대기에는 작은 무덤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누군가는 이 무덤 속에 수용자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죽어서도 가족들이 찾지 못할 것이며 이 공간에서 벌어진 감금과 학대를 알릴 수 없다. 나간다고 해도 부랑자로 낙인찍은 시선들이 우리들이 당한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철창 밖 사람들이 탄생과 동시에 매우 느린 속도로 사망에 다가서는 그 시간에 우리는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외부 병원으로 나가는 절차는 까다로웠다. 운동장에서 숨이 넘어가려는 한 할머니는 들것에 실려 있었다. 복지원 관리자들은 외부 출입을 시키느니 마느니 옥신각신했다. 할머니는 결국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회 병원으로 보냈다가 도망을 치는 사례가 생기자 외부 병원으로 가는 조건은 점차 까다로워졌다. 의사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간호사 자격증도 없는 복지원의 아이들이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찢겨진 부위를 찢고 실로 깁고 소독했다. 정신과 병동은 비밀스러웠다. 가짜 외과 의사나 간호사 노릇을 하며 병동을 관리하던 수용자들도 정신과 병동에는 들어갈 수 없다. 누가 사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복지원 내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면 창문 너머로 정신과 병동 내부가 보였다. 한 여자가 그곳에 있다. 벌거벗은 젊은 여자가 침대에 묶여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고함을 친다. 누구도 듣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 여자는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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