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창 준비위원장
[짬] 한국아나키스트 기념사업회 이문창 준비위원장
해방 뒤에는 무명회·흑백회…
민중 계몽·자주학습운동 펼쳐
6·25땐 ‘반전’…입대 거부 수감돼
제왕적 권력의 분권화도 촉구 “어린 시절 일제와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나키스트 이문창의 첫번째 타도 대상은 물론 일제였다. 충북 진천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함께 경찰에 끌려가 몽둥이로 맞는 고문을 당했다. 공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한겨울 맨발로 동네를 몇바퀴 도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이를 본 어린 이문창은 뒷산에 올라가 매일 기도를 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왜놈들을 하루빨리 퇴치시키고, 가엾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게 하여 주소서. 그날을 위해 나의 한 몸을 던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일제는 그가 18살 때 이 땅에서 물러갔다. 그가 일제 타도를 위해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청년 이문창의 가슴은 뛰었다. 서울로 올라왔다. 이 사회를 위해 무언가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한 그는 서울에서 아나키스트 집단을 만났다. 을지로의 한 적산가옥 2층에 모인 젊은이들은 ‘무명회’였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와 한반도, 일본 등지의 지하에서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이 되자 지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들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발족시켰고, 그는 그들의 심부름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산하 ‘흑백회’에 가입해 민중에 대한 계몽운동을 했다. 흑백회는 해방 이후 떠돌이 낭인이나 시장 상인 등 밑바닥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치중했다. “해방은 반쪽 해방이었어요. 온전히 우리 민족의 주권을 가져야 진정한 해방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민중의 완전한 자유, 평등을 실현하는 지방자치를 추구했어요.” 그는 곧 청년 아나키스트 조직인 ‘설형회’ 조직의 주역으로 자주학습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의 주도로 남한 단독 정권이 들어서자 좌절을 하면서 그들만의 혁명정부를 꿈꿨다. 6·25전쟁은 이문창에게 레지스탕스로 반전·반공산 지하운동을 하는 기회가 됐다.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에 머물며 그는 단파방송으로 유엔군 등의 참전 소식을 청취하고, 이런 뉴스를 일반 민중에게 전파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다 인민군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탈출했고, 수복 뒤엔 다시 국군한테 붙잡혀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전쟁 도구가 될 수 없다”며 군 입대를 거부해 제주도의 수용소에 수감됐다. “남과 북이 세계적 권력의 꼭두각시가 돼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것에 항거했어요. 반지배와 반권력을 추구하는 아나키즘 사상은 나의 신념이기도 했어요.” 그는 제주도 수용소에서 21일간 목숨을 건 단식을 하기도 했다. 1953년 휴전으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아나키스트 선배들이 세운 ‘국민문화연구소’에 들어가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글을 모르는 농부들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역시 아나키스트를 탄압했기에 그가 자유롭게 활동할 공간은 없었다. 한때 통신사 외신기자로도 일했던 그는 2008년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를 통해 ‘제1세대 아나키스트’의 활동을 정리해냈다. “해방 뒤 아나키스트 운동은 정치에 뛰어든 그룹과 사회운동을 한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두 그룹은 수시로 접촉하며 시민사회운동의 기반을 마련했어요. 그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농촌봉사활동의 계기를 마련했어요.” 박열, 이희영, 신채호 선생 등을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 꼽는다. 마흔이 넘어서야 결혼한 그는 평생 돈벌이를 못 했다. 딸 둘을 힘들여 키운 아내는 14년 전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미안하기만 해요. 아내에겐 내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아나키스트로 살 것입니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직접 민주주의 공동생활 훈련에 힘쓴 이 땅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유지를 받들어 제왕적 권력의 분권화를 촉구하고, 주눅이 든 백성들에게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의욕을 불어넣고 싶어요.” 멋진 주름이 자리잡은 그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퍼진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nihao@hani.co.kr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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