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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3년 동안 일밖에 모르던 남편…‘나 몰라라’ 회사 참 무서워요”

등록 2014-07-27 20:32수정 2014-08-04 10:30

고 정철모씨의 생전 모습. 집보다 일이 늘 먼저였던 정씨는 하이닉스에서 일하다 2008년 11월27일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숨졌다.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 작은딸이 4살 때였다. 정철모씨 유족 제공
고 정철모씨의 생전 모습. 집보다 일이 늘 먼저였던 정씨는 하이닉스에서 일하다 2008년 11월27일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숨졌다.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 작은딸이 4살 때였다. 정철모씨 유족 제공
[심층리포트] 또 하나의 비극, 하이닉스
산재 소송중인 고 정철모씨 유족

주로 연구소 업무…41개 특허 받아
건장하던 남편 2주 동안 감기처럼
악성림프종 치료 제대로 못 받고 사망

공단, 연관성 없다며 산재 승인 거부
회사·동료들 협조 않고 연락 피해
“인과관계 불충분” 1심 패소 판결
증거 찾기도 유족 몫…항소심에 기대
“2008년 11월 갑자기 남편 몸이 안 좋아졌어요. 2주 정도 감기처럼 앓았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갔더니 악성 림프종이라는 거예요. 항암치료 한 번 받고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사흘을 보낸 뒤 세상을 떠났어요.”

아내 장영은(46)씨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남편 고 정철모씨는 하이닉스에서 일하다 2008년 11월27일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숨졌다. 향년 42.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 작은딸이 4살 때였다. 가족의 병력은 없었다. 비호지킨 림프종은 백혈병과 함께 대표적인 ‘반도체 산업재해’로 꼽힌다.

“애 아빠는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어요. 자다가도 회사라고 하면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곤 했죠. 일하면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논문 심사만 남겨둔 상태였는데, 그렇게 가실 줄은….”

고려대 화학과와 같은 대학원 석사를 마친 정철모씨는 1996년 5월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 메모리연구소에 4급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13년 동안 경기도 이천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생산라인에서 반도체 공정에 관한 실험을 하거나 연구소에서 기술개발·연구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를 통해 41개의 특허도 받았다.

키 174㎝에 몸무게 91㎏으로 건장했던 남편의 느닷없는 죽음에 아내 장영은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냈다. 하지만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의 의뢰를 받아 역학조사를 실시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정철모씨가 담당한 특허 개발 과정에서 비호지킨 림프종을 유발하는 벤젠과 전리방사선은 검출되지 않았다”며 “현장에서 웨이퍼(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를 직접 다루는 오퍼레이터와 비교해 (발암물질에 대한) 노출 빈도 및 정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럼 근로복지공단의 말대로 노출 빈도가 남편보다 높다는 오퍼레이터들에 대해서는 공단이 과연 산재 승인을 제대로 해주었나요?” 장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회사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남편은 입사 초기 6년여 동안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비율이 적게는 50%, 많게는 70%에 달했는데 어떻게 노출 빈도가 낮다고 할 수 있나요.” 또 정씨가 출원한 41개의 특허 내용을 보면 감광제·시너·비소 등을 다룬 것으로 나오고 감광제·시너에는 벤젠 성분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조사 결과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2012년 행정소송을 냈다.

소송은 순탄하지 않았다. 회사는 남편의 업무 관련 기록조차 잘 내주지 않으려 했고, 옛 직장 동료들은 하나같이 장씨의 연락을 피했다. 남편이 제일 아끼던 한 후배는 “죄송하다. 저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전화를 끊었다. 노조에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결국 지난해 12월9일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윤인성)는 악성 림프종 발생과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고, 유족들은 항소했다.

항소심에서 유족들과 변호인은 정씨가 생산설비를 ‘셋업’(설치)하기 위해 청주공장에 6개월 동안 파견갔던 것에 주목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셋업 작업을 오랫동안 해온 한 엔지니어는 “최적의 공정 레시피를 개발하기 위해서 유해 화학물질과 중금속의 비율을 바꿔가며 수많은 테스트를 한다”며 “밥 먹듯이 야근과 밤샘작업을 하는데 이때 평상시보다 더 많은 유해요인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족들의 소송 대리인인 박영만 변호사는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실시한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 건강영향 역학조사’를 보면 2005년 하이닉스에서 정철모씨와 같은 엔지니어 중에 비호지킨 림프종에 걸린 사람이 있었고, 정씨와 같은 연구소에 엔지니어로 근무한 사람이 1999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업무 관련성이 없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산재 신청과 소송을 겪으며 장씨는 “13년 동안 일밖에 모르던 남편을 이렇게 나몰라라 하는 걸 보면서 회사라는 게 이런 데인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두 딸과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그는 다가오는 항소심 판결에 남은 희망을 걸고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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