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세종은 경청 잘해 성공…지금 정치인들 ‘여민정신’ 닮길”

등록 2014-07-16 19:02수정 2015-01-19 16:14

박현모 소장.
박현모 소장.
[짬]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소장
“세종은 경청(傾聽)에 능했어요.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은 지도자의 ‘덕목’이 아닌 중요한 ‘능력’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不通)이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약 600년 전에 <훈민정음>을 만들어 성군이란 칭송을 받고 있는 세종은 신하들의 이야기를 유난히 잘 들어 소통에 능한 임금이었다고 한다. 1만800쪽에 이르는 <세종실록>을 13년간 12번 완독하고, 최근 <세종이라면>이라는 책을 펴낸 박현모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은 “박 대통령에게 경청의 능력이 아쉽기만 하다”고 말한다. 박 소장은 “세종의 리더십은 비록 과거의 것이나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리더십으로 손색이 없다”고 평가한다.

1만8백쪽 ‘세종실록’ 13년간 12번 읽고
최근 ‘세종이라면’ 책 펴내
“인재 발탁때 학파·지역 안따지고
오로지 그 일 잘할 것인지만 봐”
‘절조·염치·바른말’ 선발 지침삼아

박 소장은 “경청을 하려면 세가지 능력이 필요한데 세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추었어요. 그 첫번째는 남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 인내심이고, 두번째는 유익한 이야기를 가려듣는 분별력이고, 세번째는 믿고 맡기는 모험적인 위임력입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잘 들어줬기에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라고 진단한다.

박 소장은 세월호 참사 등 각종 국가적 재난이 이어지는 현재, 비슷한 재난을 극복하고 오히려 국운융성의 기회로 만든 세종의 리더십은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의 리더십’이라고 말했다.

세종은 재위 4년(1422년)과 5년 연이은 강원도의 대기근을 해결해야 했다. 태종(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스물두살에 임금에 취임해서 처음 맞은 시험대였다. 당시 대기근으로 강원도 인구의 30% 정도가 굶어 죽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고, 60%의 토지가 황폐화됐다고 한다. 세종은 우선 현지의 실태 파악에 주력했다. 현지 관리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 보고를 거듭 촉구했고, 이를 토대로 구휼업무를 최우선적으로 처리하게 했다. 두번째는 굶주린 백성(기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했다. 고향을 떠도는 백성들이 많아졌으나 굶주려 죽는 사람은 적어졌다. 구휼 방식을 바꿔서 기민들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으며, 구휼 담당자를 아전이 아니라 승려들로 교체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승려에게 음식을 나눠 주게 한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시민단체한테 구휼을 전담하게 하여 구휼업무의 효과를 높인 것이었다.

세종은 1426년에 발생한 도성 대화재 사건에서도 특유의 위기극복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박 소장은 설명한다.

재위 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도성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200호의 민가가 불에 탔고, 어린이와 노약자 등 32명이 숨졌다. 세종은 화상을 입은 자는 의원에게 치료를 받게 했으며, 사망한 자에 대해서는 쌀과 종이, 거적 등의 물품을 주어 장사 지내도록 했다. 일정한 간격마다 우물을 파게 했고, 종묘와 대궐 안과 종루에 불 끄는 기계를 설치했다. 또 방화업무를 전담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했고, 방화자를 고발하는 자에 대해 파격적인 혜택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도성의 도로를 정비하고 가옥 구조를 개선하는 등 세종은 도성 대화재라는 사건을 계기로 수도 한양을 총체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그 결과 주작대로에 기와집이 즐비한 위풍당당한 수도로 격상될 수 있었다고 박 소장은 설명한다.

박 대통령이 국무총리 인선에 거푸 실패하며 지지율이 추락한 현실 속에서 과연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세종은 가정에서도, 조정에서도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느끼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성들의 소리를 가장 가깝게 들을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어요. 경복궁 사정전과 경회루 사이에 작은 억새풀 띠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며 ‘동고’(同苦) 정치에 들어간 것이죠. 당시 가뭄과 역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박 소장은 “세종은 인재를 등용하고 발탁할 때 그 사람의 신분, 가문, 학파, 지역 등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 일을 잘할 수 있느냐’를 보았다”고 설명한다. 인재에게 일을 맡긴 다음엔 성과를 거둘 때까지 믿고 맡기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인재들이 유독 세종 시대에 많이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세종은 신분이 아닌 덕망과 재능을 우선해 인재를 발탁했고, 그 사람의 재능이 그 자리에 적합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종은 인재 선택에서 마음바탕이 착하고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고, 선발한 인재를 집현전이나 성균관과 같은 전문 교육기관에서 연구하도록 하여 전문 인력으로 양성하는 한편 인재들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박 소장은 말했다. 세종은 재위 20년에 내린 인재 선발 지침에서 몸가짐에 절조와 염치가 있고, 바른말을 용감하게 하고, 선비로서 우뚝한 행실이 고을 안에 알려지고, 다른 사람이 신뢰할 정도로 재예가 출중한 자를 뽑으라고 했다고 한다. 도덕성과 능력을 함께 보되, 직언할 수 있는 인재인가 아닌가를 무엇보다 중시했다는 것이다.

정조의 개혁정치로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쓴 박 소장은 세종과 정조 모두 인재를 귀하게 여겼고, 그 인재들로 하여금 신명나게 일하게 하는 데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열흘 일정으로 경기도 일대의 파주(황희, 율곡), 수지(조광조), 안산(이익), 김포(조헌), 시흥(강희맹), 포천(이항복), 마석(정약용), 양평(이중하) 등의 역사 기행을 통해 조선시대의 역동성을 느꼈다고 한다.

광화문의 세종 동상 지하에 있는 세종기념관의 기획을 맡기도 했던 박 소장은 “세종은 백성을 진심으로 나라의 뿌리로 생각했고, 그들과 더불어 다스려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다”며 “그런 세종의 여민(與民) 정신을 지금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배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단독] 여인형, 계엄해제 전 “자료 잘 지우라”…불법인지 정황 1.

[단독] 여인형, 계엄해제 전 “자료 잘 지우라”…불법인지 정황

[단독] ‘체포 시도’ 여인형 메모에 ‘디올백 최재영’ 있었다 2.

[단독] ‘체포 시도’ 여인형 메모에 ‘디올백 최재영’ 있었다

이재명 ‘위헌법률심판 제청’ 선거법 재판부 “예정대로 2월 말 결심” 3.

이재명 ‘위헌법률심판 제청’ 선거법 재판부 “예정대로 2월 말 결심”

[단독] 대답하라고 ‘악쓴’ 윤석열…“총 쏴서라도 끌어낼 수 있나? 어? 어?” 4.

[단독] 대답하라고 ‘악쓴’ 윤석열…“총 쏴서라도 끌어낼 수 있나? 어? 어?”

“급한 일 해결” 이진숙, 방송장악 재개?…MBC 등 재허가 앞둬 5.

“급한 일 해결” 이진숙, 방송장악 재개?…MBC 등 재허가 앞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