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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더이상 당신들을 믿을 수 없어요”

등록 2014-04-20 20:19수정 2014-04-21 00:45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20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진도체육관을 출발해 청와대를 향해 걷고 있다. 진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20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진도체육관을 출발해 청와대를 향해 걷고 있다. 진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진도체육관 애끊는 현장 르포

더딘 구조작업에 지친 가족들
새벽길 행진, 경찰벽에 돌아서
“박대통령, 1초가 아깝다더니…”
실종자 가족들이 전남 진도로 내려온 이후 가장 맑은 날이었다. 사고 발생 닷새째인 20일,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이들조차 ‘부활절의 기적’을 기대할 법한 날씨였지만 탁하게 출렁이는 바다는 쉽게 생존자를 돌려주지 않았다.

전남 진도체육관 입구에는 전날 오전 유전자(DNA) 채취소가 차려졌다. “부모님들이 나와야 합니다. 부모님이 없으면 외삼촌까지 가능합니다.” 검경 합동수사본부 신원확인팀이 설치한 천막에서는 ‘수사용’이라고 적힌 ‘유전자 감식자료 채취동의서’를 손에 쥔 한 어머니가 “별걸 다 한다”며 허망하게 웃었다. 천막 밖으로 가족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딸이 구조자에서 실종자로 바뀌었다고 울부짖던 아버지도 거기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바싹 타들어가는 입을 힘겹게 벌렸다. 면봉으로 입 안쪽을 긁어 채취한 유전자는 살아올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채취를 마친 가족들은 “내 새끼 어디 갔어”, “이 추운데 어디 있니…”라며 다시금 울음을 토해냈다. 지문을 확인할 주민등록증도 아직 발급이 안 될 정도로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날 새벽 1시30분, 세월호 선체 안에서 주검이 발견됐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냥 있을 수가 없게 된 실종자 가족 대표단은 버스를 타고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새벽 2시께 300여명의 가족들이 구호품으로 받은 모포를 두르고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그런 가족들 앞을 경찰 100여명이 득달같이 막아섰다. 경찰이 4차선 도로로 나서는 가족들 앞을 통제하자 몸싸움이 벌어졌다.

사흘 전 새벽 체육관을 찾았다가 가족들의 물병 세례를 받았던 정홍원 국무총리가 급히 체육관으로 왔다. 정 총리는 “모든 방법을 검토해 동원하겠다”며 가족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가족들에게 말뿐인 총리의 약속은 들리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정 총리의 차량은 오전 5시가 되어서야 체육관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가족들은 10㎞를 도로 갓길을 따라 걸었다. 목포에서 케이티엑스(KTX) 고속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자는 말을 나눴다. 오전 6시30분쯤 진도대교를 앞두고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 3개 중대가 가족들을 에워쌌다. 실종 상태인 안산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군의 어머니 정혜숙씨가 쉬어버린 목으로 외쳤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시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빨리 꺼내달라는 것입니다. 내 새끼 눈 마주치고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동안 구조작업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없어서 직접 나왔습니다. 당신들은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 건가요. 1분 1초가 아깝다던 대통령은 어디 갔나요. 나도 지치고 힘들고 이러는 모습 보여 창피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게 창피합니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못 해줘서 창피합니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어른들이 창피합니다.”

오전 10시께 가족들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경찰이 막아섰다. “정부는 살인자다”, “아이들을 살려내라”고 외치는 가족들을 향해 동영상 카메라를 든 경찰이 ‘채증’을 시작했다. “우리가 시위대냐. 우리가 폭도냐”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경찰은 황급히 카메라를 숨겼다. 경찰은 “교통장애도 있고 (도로 행진이) 위험해서 제지했다. 채증은 대원들이 습관적으로 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경찰관 직무집행법 등 관련 법규 어디에도 경찰의 행동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가족들은 정 총리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걸음을 멈췄다.

오후에 진도체육관에서 만난 임아무개씨의 둘째 딸 박아무개양은 실종 상태다. 임씨는 다시 체육관을 찾은 정 총리가 가족 대표들과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회의 결과를 알기 위해 체육관 무대 앞으로 나와 있었다. “난 어제 포기했어요. 그런데 우리 큰딸이 꿈을 꿨다는 거예요. 새가 동생을 데려가려고 하는데 동생이 가기 싫다고 해서 결국 새가 못 데려갔대요. 그 꿈 이야기를 듣고는 좀 더 기다리려고 마음을 바꿨어요. 안 데려간 거잖아요. 둘째 딸은 우리 집에서 애기였어요. 겁이 많아서 혼자서는 가스레인지 불도 못 켜는 애였는데…. 못 해준 게 너무 마음에 걸려요. 눈이 나빠서 안경 벗으면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지금 안경은 쓰고 있을지….” 딸 이야기를 하는 임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부가 제대로 구조를 안 하잖아요. 이제 100시간이 지나고 있는데…. 이건 100% 인재예요. 그래도 전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어요. 하느님이 여물지도 않은 애들 벌써 데려가실 리가 없잖아요. 부활시켜줄 거예요.”

회의가 끝난 뒤 정 총리는 체육관에 있는 다른 가족들을 만나지 않고 빠져나갔다. “총리가 왜 직접 말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곧 브리핑이 있을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 대표들은 구조작업에 대한 정확한 설명, 가족 중심의 장례 절차, 해양수산부 장관과 가족 간 핫라인 개통 등을 요구했다.

대통령이 왔다 간 뒤 체육관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 ‘인양한 시신 3구에서 허아무개군, 김아무개군의 학생증을 발견했다’는 글귀가 띄워졌다. “정부가 책임져라.” 한 어머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체육관 가득 울렸다.

경기 안산공단에서 일하는 한 학부모는 “공단지역이라 깔봐서 구조작업이 늦어지나, 이런 생각도 든다”며 정부의 늑장 대처를 비판했다. 단원고 학생 5명이 다니는 안산 반월교회 정석재(42) 목사는 “가족들한테서 나아진 게 없다는 말을 들었다. 자식 잃은 슬픔뿐 아니라 정부 대응에 배신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다. 교회에서 부활절은 가장 기쁜 날인데, 제발 안산에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진도/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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