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군 사법의 저울
② 괘씸죄에 걸린 사법 피해자들
② 괘씸죄에 걸린 사법 피해자들
2010년 3월 육군에 입대해 2012년 제대한 김아무개(26)씨는 지금도 우울증 약을 먹는다. 입대 때 휴학한 학교도 아직 못 마쳤다. 그의 20대는 군과의 법정 싸움으로 흘러갔다. 김씨가 헌병대에 긴급체포된 건, 2011년 12월26일이었다. 제대를 닷새 앞둔 그날 밤 10시 넘어 헌병대가 내무실로 들이닥쳤다. 현행범으로 그는 영창에 끌려갔다. 혐의는 무고죄였다.
김씨는 경기도 한 사단의 수색중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김씨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선임의 지시로 배낭에 돌을 넣고 연병장을 돌았다. 3시간 동안 군가를 부르게 시켰다”고 하소연했다. 아버지는 “군 생활이 편할 수는 없다. 조금만 버티면 다 지나간다”고 달랬다. 하지만 버티고 버텨도 괴롭힘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결국 소대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가 ‘부적응자’로 찍혔다.
군 입대 아들이 폭력에 시달려
부모가 고발하자 군이 회유·협박
항소심 무죄까지 2년여 흘러 김씨는 간부에게까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해 9월 당시 행정보급관이던 이아무개 상사가 야간 경계근무 중 암구호를 늦게 댔다고 죽도로 발가락이 찢어질 정도로 때린 일도 있었다. 이 상사에게 ‘군 생활이 힘들다’고 털어놓자 벌목할 때 쓰는 칼을 가져와 총기함 사이 틈을 찌르면서 ‘묻어버리겠다’는 말도 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일부 소대장과 행정보급관들도 (나를) 구타해도 좋다고 말하고, 영창에 보내겠다는 등 협박이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부모가 면회 왔다. 테이프를 감은 부러진 안경테와 멍든 몸을 본 김씨의 아버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연대장 등 지휘관을 면담했고, 관련자 징계도 요구했다. 폭행에 가담한 병사 18명 가운데 8명을 영창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아버지는 돌아왔다. 김씨의 아버지는 다 풀린 줄 알았다. 아들의 하소연도 줄었다. 하지만 1년 뒤에야 사병들은 영창에 갔지만 중대장·소대장 등 지휘관들은 모두 구두경고만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리책임이 있는 것은 물론 직접 폭행에 가담하기까지 했던 간부들이 구두경고만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김씨의 아버지는 군 검찰에 문아무개 연대장과 유아무개 중대장 등 간부 6명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2011년 10월 고발했다. 협박과 회유는 사건 조사와 함께 시작됐다. 김씨의 아버지에게 ‘고발을 취하해 달라’는 연대장의 전화가 잇따랐다. 군에 남아 있던 아들 김씨는 고발 관련 조사를 해야 한다는 군 검찰에 불려가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받았다. 김씨는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 사이 죽도를 휘두른 이아무개 행정보급관만 약식기소돼 벌금형을 받았다. 김씨는 제대 5일 전 체포돼 사단 헌병대 영창에 갇혔다. 아버지의 고발장 내용 일부가 김씨의 거짓말로 만들어졌다는 이유였다. 보통군사법원이 체포·구속적부심사에서 김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지만, 군 검찰은 무고죄로 약식기소했다. 군 복무를 마친 김씨는 법원의 약식명령을 따르지 않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지난해 8월 ‘진술 내용이 허위사실이라는 적극적인 증명이 있다고 보기에 부족하다’며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마음의 병을 얻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일관하는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 상처가 됐다. 폭행 사실도 김씨를 군에서 치료한 뒤 전역한 의무병을 직접 찾아 증인으로 세운 뒤에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검찰은 항소했다. 결국 지난달 9일에야 수원지법에서 ‘원심 판단에 사실을 오인한 잘못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항소 기각 판결을 받아냈지만, 제대 뒤 2년이나 흐른 뒤였다. 소송비용만 1000만원이 넘게 들었고, 김씨는 심리상담까지 받기 시작했다. “조용히 사건을 무마하자는 군 지휘관의 권유를 듣지 않고 고발을 취하하지 않자 괘씸죄에 걸려 기나긴 고통을 받았다.” 김씨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밝지 않다. 군의 결정에 입 다물고 넘어가지 않았다가 괘씸죄로 피폐해진 이는 김씨뿐만이 아니다. 군 검찰에 기소되고 오랜 시간 힘겹게 법정 다툼을 벌인 이들은 적지 않다. 상명하복의 문화가 군 사법체계에까지 비합리적으로 물든 탓이다.
2010년 1월17일은 박재관(28)씨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군인의 길을 꿈꾼 박씨는 대학 2학년을 마친 뒤 2008년 경북 영천시 육군3사관학교에 들어갔다. 2010년 3월 임관식만 잘 마치면 꿈은 이뤄질 터였다. 그날 박씨는 후배 김아무개씨의 생일을 축하하려던 것뿐이었다. 박씨 등 10여명이 1만원씩 돈을 걷어 생일 케이크와 과자를 샀다. 3~4학년생들은 김씨한테 이불을 덮고 엉덩이와 허벅지를 때렸다. 엉덩이엔 근육통 소염제를 발랐다. 짓궂은 축하 행사인 이른바 ‘생일빵’이었다.
훈육대장은 다음날 성 군기 위반과 가혹행위에 해당한다며 징계에 나섰다. 박씨 등 4명은 완전군장을 하고 연병장을 돌았다. 반성문도 썼다. 그뿐이었다. 훈육대장은 “더 이상의 처벌은 없다”고 했고, 이들은 친구들과 졸업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나 훈육위원회는 그해 2월1일 이들의 퇴교를 결정했다.
박씨는 그해 3월 대구지법에 퇴교명령 취소 청구소송과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가처분이 받아들여졌다. 박씨 등은 돌아간 학교에서 고립된 채 사실상 ‘감옥 생활’을 했다. 육군3사관학교는 역사상 처음 있는 ‘퇴교처분 집행정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씨는 “훈육관이 ‘우리는 시간을 끌면 이기게 돼 있다. 개인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박씨가 버티자 군 검찰은 그해 5월25일 ‘생일빵’을 공동폭행 혐의로 보고 박씨 등을 기소했다. 육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육군3사관학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명예를 훼손했다”며 50만원 벌금형을 선고했다.
대구지법은 그해 11월 퇴교명령 취소 소송에서 ‘학교의 명령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소송에 지면서, 2년간 장교 교육을 받은 그는 현역으로 입대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복무한 뒤 제대했다. 박씨는 군인의 꿈을 접고 지난해 3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 처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아 군 검찰에 기소됐고, 오랜 법정 싸움으로 우울증이 생겼어요. 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박승헌 박유리 기자 abcd@hani.co.kr
부모가 고발하자 군이 회유·협박
항소심 무죄까지 2년여 흘러 김씨는 간부에게까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해 9월 당시 행정보급관이던 이아무개 상사가 야간 경계근무 중 암구호를 늦게 댔다고 죽도로 발가락이 찢어질 정도로 때린 일도 있었다. 이 상사에게 ‘군 생활이 힘들다’고 털어놓자 벌목할 때 쓰는 칼을 가져와 총기함 사이 틈을 찌르면서 ‘묻어버리겠다’는 말도 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일부 소대장과 행정보급관들도 (나를) 구타해도 좋다고 말하고, 영창에 보내겠다는 등 협박이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부모가 면회 왔다. 테이프를 감은 부러진 안경테와 멍든 몸을 본 김씨의 아버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연대장 등 지휘관을 면담했고, 관련자 징계도 요구했다. 폭행에 가담한 병사 18명 가운데 8명을 영창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아버지는 돌아왔다. 김씨의 아버지는 다 풀린 줄 알았다. 아들의 하소연도 줄었다. 하지만 1년 뒤에야 사병들은 영창에 갔지만 중대장·소대장 등 지휘관들은 모두 구두경고만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리책임이 있는 것은 물론 직접 폭행에 가담하기까지 했던 간부들이 구두경고만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김씨의 아버지는 군 검찰에 문아무개 연대장과 유아무개 중대장 등 간부 6명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2011년 10월 고발했다. 협박과 회유는 사건 조사와 함께 시작됐다. 김씨의 아버지에게 ‘고발을 취하해 달라’는 연대장의 전화가 잇따랐다. 군에 남아 있던 아들 김씨는 고발 관련 조사를 해야 한다는 군 검찰에 불려가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받았다. 김씨는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 사이 죽도를 휘두른 이아무개 행정보급관만 약식기소돼 벌금형을 받았다. 김씨는 제대 5일 전 체포돼 사단 헌병대 영창에 갇혔다. 아버지의 고발장 내용 일부가 김씨의 거짓말로 만들어졌다는 이유였다. 보통군사법원이 체포·구속적부심사에서 김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지만, 군 검찰은 무고죄로 약식기소했다. 군 복무를 마친 김씨는 법원의 약식명령을 따르지 않고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지난해 8월 ‘진술 내용이 허위사실이라는 적극적인 증명이 있다고 보기에 부족하다’며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마음의 병을 얻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일관하는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 상처가 됐다. 폭행 사실도 김씨를 군에서 치료한 뒤 전역한 의무병을 직접 찾아 증인으로 세운 뒤에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검찰은 항소했다. 결국 지난달 9일에야 수원지법에서 ‘원심 판단에 사실을 오인한 잘못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항소 기각 판결을 받아냈지만, 제대 뒤 2년이나 흐른 뒤였다. 소송비용만 1000만원이 넘게 들었고, 김씨는 심리상담까지 받기 시작했다. “조용히 사건을 무마하자는 군 지휘관의 권유를 듣지 않고 고발을 취하하지 않자 괘씸죄에 걸려 기나긴 고통을 받았다.” 김씨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밝지 않다. 군의 결정에 입 다물고 넘어가지 않았다가 괘씸죄로 피폐해진 이는 김씨뿐만이 아니다. 군 검찰에 기소되고 오랜 시간 힘겹게 법정 다툼을 벌인 이들은 적지 않다. 상명하복의 문화가 군 사법체계에까지 비합리적으로 물든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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