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토요판] 몸
‘꼬리’에 관한 단상
‘꼬리’에 관한 단상
▶ 꼬리 하면 떠오르는 동물이 있습니다.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 구미호지요. 우리 민담 속에서 구미호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해 사람(주로 남성)을 홀리고 사람을 죽이거나 간을 빼먹는 오싹한 이미지로 그려져서일까요. 선후관계는 정확히 모르지만 ‘꼬리 친다’는 말은 그렇게 여성에 대해 나쁘게 해석하는 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녀를 불문하고 꼬리를 친다고 하는 학계의 주장이 나왔습니다. 흡사 학자들의 ‘양심선언’처럼 들립니다.
‘남은 꼬리가 꿈틀대는 동안 도마뱀은 달아나지. 잘린 꼬리가 자라는 동안 도마뱀은 생식도 성장도 하지 않는다. 그이가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아파하지 마시길. 당신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동안 당신은 살아남은 거야. 꼬리 치는 당신도 아팠다고.’(권혁웅 ‘꼬리 치는 당신도 아팠다고’ 전문, <꼬리 치는 당신> 부분)
‘꼬리 친다’는 그리 점잖지는 않은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떠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데, 사전의 예문은 주로 주어가 여성이다. 요즘은 권혁웅 시인이 <꼬리 치는 당신>이라는 책도 펴내고, 그 안에서 ‘꼬리 치는 당신도 아팠다고’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건네서인지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이 덜해진 느낌이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가 여성에게 ‘꼬리 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여성은 모욕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를 테지만.
꼬리가 없는데도 꼬리 친다고?
그 말은 주로 부정적으로 쓰인다
‘양심에 털 났다’ 같은 느낌에
환심을 사려는 동물도 떠오른다
한데 왜 그 표현을 여성에게 쓰나
어떤 진화심리학 결과에 따르면
사람은 가임기를 숨기지 않는다
정반대의 가설은 설 자리 잃었다
사람도 정말 꼬리 친다는 말이다
고릴라, 침팬지, 긴팔원숭이에게서 힌트 얻다 꼬리를 친다는 말이 왜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지 잠시 생각해봤다. 먼저 사람에게는 꼬리가 없는데 꼬리를 친다고 했기 때문일 가능성. 이건 사람은 몸에 털이 별로 없는데(사실은 없는 건 아니고 눈에 안 띌 만큼 가는 것뿐이지만) ‘양심에 털이 났다’고 하면 화를 내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털 자체가 왠지 인간이 지녀서는 안 될 것,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 동물적인 것, 부정한 것의 느낌을 지니기 때문에 양심에 난 털도 나쁜 의미가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인간은 꼬리가 없고 꼬리를 치면 안 되기 때문에, 꼬리를 쳤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띤다. 둘째는 꼬리를 치는 행위가 어딘가 지나치게 환심을 사려는 동물을 떠올릴 가능성. 가장 가까운 예는 가축인 개다. 개가 꼬리를 치는 것은 대개 기쁨과 환대의 의미이지만, 가끔은 사람에게 혼난 뒤에 환심을 사려 하거나 먹을 것을 염두에 두고 떠는 아부일 때도 있다는 것을 개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왜 꼬리 친다는 표현을 여성에게 주로 썼을까. 상대를 유혹하려는 행동이야 남녀 불문 아닌가. 최근에는 오히려 남성 쪽에서 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서 순종적인 여성의 가치관을 장려하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잘 알려져 조금은 하품 나오는 이야기가 될 테니 관두자. 그런데 없는 꼬리를 친다 한다고 너무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사실 사람도 꼬리 친다. 물론 진짜 꼬리를 흔든다는 뜻은 아니고, 비유다. 일견 ‘반여성적인’ 생각이 다시 떠오를 수도 있으나, 진실은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도 높으므로 혹시라도 미리 너무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유명한 진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 끌리도록 유도하는 신체 변화를 보인다. 물론 아무 때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가임기 때에 한해서다. 배란기가 되면 여성은 평소와는 달리 미세하게 다른 행동을 한다. 목소리나 몸내(체취) 등이 좀더 매력적으로 변하며, 무의식적으로 더 예쁜 옷을 입거나 입고 싶어한다. 일부 남성 역시 여성의 이런 미묘한 변화를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깨닫고 거기에 반응해 매력을 느낀다. 여성이 단지 수동적으로 매력을 발산하고 선택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어서, 이 시기엔 좀더 강인한 신체를 가진 남성에게 더 민감하게 끌리는 경향(주로 후각을 통해 끌린다)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과정은 동물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가임기가 정해져 있고 자손을 남기려는 암컷이라면, 정해진 배란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컷에게 어필하는 게 유리한 행동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임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라면 인간 역시 그 과정에 동참하는 게 맞다. ‘꼬리를 치는’ 것은 현명한 결정이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가임기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만약 어필을 하려면 대놓고 꼬리를 흔들어야 할 텐데 왜 그러지 않을까. 나아가, 혹시 오히려 가임기를 적극적으로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은 많은 진화학자와 영장류학자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인류의 성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힌트를 얻으려 한 학자들은 대형 영장류, 그중에서도 사람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에 주목했다. 먼저 주목한 것은 수컷의 덩치다. 고릴라와 침팬지, 긴팔원숭이는 각각 ‘하렘’이라 불리는 일부다처제와 난교, 일부일처라는 극단적으로 각기 다른 짝짓기 패턴을 보인다. 이를 위해 각각 몸의 덩치를 키우거나 정소의 크기를 키우는 전략을 택했다. 고릴라는 일단 힘으로 경쟁자를 물리친 뒤 여유롭게 암컷들과 짝짓기를 한다. 당연히 체급이 클수록 유리하고, 이 때문에 수컷 고릴라는 몸무게가 암컷의 두 배에 이르도록 계속 진화했다. 침팬지는 특별히 정해진 짝 없이 난교를 한다. 이때 ‘수정’ 경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정자를 암컷에게 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침팬지 수컷은 신체 무게에 대한 고환의 무게 비율을 극단적으로 늘려 인간의 세 배에 이르게 됐다. 사람은 어떨까. 애매한 중간이다. 덩치는 남성이 여성보다 조금 더 크긴 하지만 고릴라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몸무게에 대한 고환의 무게 비율 역시 고릴라에 비해서는 4배나 크지만 침팬지에 비해서는 부끄러운 수준(3분의 1)이다. 힘 대결도, ‘정력’ 대결도 인간 남성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남성이 취해야 할 제3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그 말을 해맑게 받아들여본다면… 진화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자식을 돌보는 행위를 손에 꼽았다. 오언 러브조이 미국 켄트대 교수는 ‘인류의 기원’이라는 유명한 1981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수백만년 전 인류의 조상은 영아 사망률이 높아서 여성이 아이를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며 “따라서 (자식을 놓고) 돌아다니며 식량을 구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누군가 식량을 구하며 돌보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누군가’는 남성이며, 그에 따라 남녀가 짝을 이루는 일부일처의 핵가족이 등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많은 비판과 마주쳤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는 2012년 <과학동아> 기고문에서 “‘남자는 일하고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성 역할을 진화가 낳은 숙명적인 결과처럼 표현했다”고 지적했다. 인류가 문화적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핵가족이라는 문화적 현상도 생물학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가설에는 중요한 가정이 있었다. 바로 ‘여성은 가임기를 숨기는 쪽으로 진화해갔다’는 가정이다. 가임기를 감추면 남성은 여성이 언제 자신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남성은 자신의 자식을 남기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한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게 유리해지고, 러브조이 교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한 여성에게 꾸준히 식량을 구해오는 남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대목도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교수는 “여성이 식량을 대가로 성을 내줬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격렬한 비판에 부딪힌 것은 당연했다. 비판은 이 가정이 틀렸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며 더 거세졌다. 그게 바로 초반에 소개한, ‘사람이 가임기를 숨기지 않는다’는 진화심리학 연구 결과들이다. ‘가임기를 감춤으로써 남성을 가정에 붙든 게 인류 진화의 여명’이라는 러브조이 교수의 가설은 설 곳을 잃어갔고 일부일처와 핵가족, 성 역할의 분화 등의 주제는 다시 미궁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인류가 지닌 문화적 속성으로 이들을 풀이하려는 인류학자들이 늘고 있다. 비록 러브조이 교수는 2009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수백만년 전 인류에 대한 논문에서도 여전히 뜻을 전혀 굽히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일부 인류학자들의 공분을 샀던 약간은 반여성적인 면이 있는 주장을 잠재울 수 있는 근거가, 역시 아직은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은 ‘꼬리 치는’ 행동이라니 조금 역설적이다. 하지만 권 시인이 성별을 가리지 않은 채 누군가 다른 이의 관심과 눈길을 기다리는 행동을 ‘꼬리를 친다’고 일컬었듯, 그 말을 성차별적이지 않게, 순수하고 따스하게 받아들일 순 없을까. 모두가 모두에게 잘 보이려 꼬리를 치고 그게 흉이 되지 않는 사회. 실제로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회. 유인원 중엔 오직 보노보만이 도달한 달콤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 서로가 헐뜯고 미워하는 사회보다는 아름답지 않을까. 비결은 몸에 있다. 우리 모두 꼬리를 치자. 눈치 보지 말고, 서로. 윤신영 <과학동아> 기자
꼬리가 없는데도 꼬리 친다고?
그 말은 주로 부정적으로 쓰인다
‘양심에 털 났다’ 같은 느낌에
환심을 사려는 동물도 떠오른다
한데 왜 그 표현을 여성에게 쓰나
어떤 진화심리학 결과에 따르면
사람은 가임기를 숨기지 않는다
정반대의 가설은 설 자리 잃었다
사람도 정말 꼬리 친다는 말이다
고릴라, 침팬지, 긴팔원숭이에게서 힌트 얻다 꼬리를 친다는 말이 왜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지 잠시 생각해봤다. 먼저 사람에게는 꼬리가 없는데 꼬리를 친다고 했기 때문일 가능성. 이건 사람은 몸에 털이 별로 없는데(사실은 없는 건 아니고 눈에 안 띌 만큼 가는 것뿐이지만) ‘양심에 털이 났다’고 하면 화를 내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털 자체가 왠지 인간이 지녀서는 안 될 것,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 동물적인 것, 부정한 것의 느낌을 지니기 때문에 양심에 난 털도 나쁜 의미가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인간은 꼬리가 없고 꼬리를 치면 안 되기 때문에, 꼬리를 쳤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띤다. 둘째는 꼬리를 치는 행위가 어딘가 지나치게 환심을 사려는 동물을 떠올릴 가능성. 가장 가까운 예는 가축인 개다. 개가 꼬리를 치는 것은 대개 기쁨과 환대의 의미이지만, 가끔은 사람에게 혼난 뒤에 환심을 사려 하거나 먹을 것을 염두에 두고 떠는 아부일 때도 있다는 것을 개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왜 꼬리 친다는 표현을 여성에게 주로 썼을까. 상대를 유혹하려는 행동이야 남녀 불문 아닌가. 최근에는 오히려 남성 쪽에서 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서 순종적인 여성의 가치관을 장려하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잘 알려져 조금은 하품 나오는 이야기가 될 테니 관두자. 그런데 없는 꼬리를 친다 한다고 너무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사실 사람도 꼬리 친다. 물론 진짜 꼬리를 흔든다는 뜻은 아니고, 비유다. 일견 ‘반여성적인’ 생각이 다시 떠오를 수도 있으나, 진실은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도 높으므로 혹시라도 미리 너무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유명한 진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 끌리도록 유도하는 신체 변화를 보인다. 물론 아무 때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가임기 때에 한해서다. 배란기가 되면 여성은 평소와는 달리 미세하게 다른 행동을 한다. 목소리나 몸내(체취) 등이 좀더 매력적으로 변하며, 무의식적으로 더 예쁜 옷을 입거나 입고 싶어한다. 일부 남성 역시 여성의 이런 미묘한 변화를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깨닫고 거기에 반응해 매력을 느낀다. 여성이 단지 수동적으로 매력을 발산하고 선택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어서, 이 시기엔 좀더 강인한 신체를 가진 남성에게 더 민감하게 끌리는 경향(주로 후각을 통해 끌린다)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과정은 동물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가임기가 정해져 있고 자손을 남기려는 암컷이라면, 정해진 배란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컷에게 어필하는 게 유리한 행동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임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라면 인간 역시 그 과정에 동참하는 게 맞다. ‘꼬리를 치는’ 것은 현명한 결정이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가임기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만약 어필을 하려면 대놓고 꼬리를 흔들어야 할 텐데 왜 그러지 않을까. 나아가, 혹시 오히려 가임기를 적극적으로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은 많은 진화학자와 영장류학자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인류의 성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힌트를 얻으려 한 학자들은 대형 영장류, 그중에서도 사람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에 주목했다. 먼저 주목한 것은 수컷의 덩치다. 고릴라와 침팬지, 긴팔원숭이는 각각 ‘하렘’이라 불리는 일부다처제와 난교, 일부일처라는 극단적으로 각기 다른 짝짓기 패턴을 보인다. 이를 위해 각각 몸의 덩치를 키우거나 정소의 크기를 키우는 전략을 택했다. 고릴라는 일단 힘으로 경쟁자를 물리친 뒤 여유롭게 암컷들과 짝짓기를 한다. 당연히 체급이 클수록 유리하고, 이 때문에 수컷 고릴라는 몸무게가 암컷의 두 배에 이르도록 계속 진화했다. 침팬지는 특별히 정해진 짝 없이 난교를 한다. 이때 ‘수정’ 경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정자를 암컷에게 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침팬지 수컷은 신체 무게에 대한 고환의 무게 비율을 극단적으로 늘려 인간의 세 배에 이르게 됐다. 사람은 어떨까. 애매한 중간이다. 덩치는 남성이 여성보다 조금 더 크긴 하지만 고릴라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몸무게에 대한 고환의 무게 비율 역시 고릴라에 비해서는 4배나 크지만 침팬지에 비해서는 부끄러운 수준(3분의 1)이다. 힘 대결도, ‘정력’ 대결도 인간 남성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남성이 취해야 할 제3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그 말을 해맑게 받아들여본다면… 진화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자식을 돌보는 행위를 손에 꼽았다. 오언 러브조이 미국 켄트대 교수는 ‘인류의 기원’이라는 유명한 1981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수백만년 전 인류의 조상은 영아 사망률이 높아서 여성이 아이를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며 “따라서 (자식을 놓고) 돌아다니며 식량을 구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누군가 식량을 구하며 돌보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누군가’는 남성이며, 그에 따라 남녀가 짝을 이루는 일부일처의 핵가족이 등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많은 비판과 마주쳤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는 2012년 <과학동아> 기고문에서 “‘남자는 일하고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성 역할을 진화가 낳은 숙명적인 결과처럼 표현했다”고 지적했다. 인류가 문화적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핵가족이라는 문화적 현상도 생물학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가설에는 중요한 가정이 있었다. 바로 ‘여성은 가임기를 숨기는 쪽으로 진화해갔다’는 가정이다. 가임기를 감추면 남성은 여성이 언제 자신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남성은 자신의 자식을 남기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한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게 유리해지고, 러브조이 교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한 여성에게 꾸준히 식량을 구해오는 남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대목도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교수는 “여성이 식량을 대가로 성을 내줬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격렬한 비판에 부딪힌 것은 당연했다. 비판은 이 가정이 틀렸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며 더 거세졌다. 그게 바로 초반에 소개한, ‘사람이 가임기를 숨기지 않는다’는 진화심리학 연구 결과들이다. ‘가임기를 감춤으로써 남성을 가정에 붙든 게 인류 진화의 여명’이라는 러브조이 교수의 가설은 설 곳을 잃어갔고 일부일처와 핵가족, 성 역할의 분화 등의 주제는 다시 미궁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인류가 지닌 문화적 속성으로 이들을 풀이하려는 인류학자들이 늘고 있다. 비록 러브조이 교수는 2009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수백만년 전 인류에 대한 논문에서도 여전히 뜻을 전혀 굽히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일부 인류학자들의 공분을 샀던 약간은 반여성적인 면이 있는 주장을 잠재울 수 있는 근거가, 역시 아직은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은 ‘꼬리 치는’ 행동이라니 조금 역설적이다. 하지만 권 시인이 성별을 가리지 않은 채 누군가 다른 이의 관심과 눈길을 기다리는 행동을 ‘꼬리를 친다’고 일컬었듯, 그 말을 성차별적이지 않게, 순수하고 따스하게 받아들일 순 없을까. 모두가 모두에게 잘 보이려 꼬리를 치고 그게 흉이 되지 않는 사회. 실제로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회. 유인원 중엔 오직 보노보만이 도달한 달콤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 서로가 헐뜯고 미워하는 사회보다는 아름답지 않을까. 비결은 몸에 있다. 우리 모두 꼬리를 치자. 눈치 보지 말고, 서로. 윤신영 <과학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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