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댓글 하나도 증거 못 내놓고 계시잖아요. 캡처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못하면서, 어거지로….”
2012년 12월16일 대선 사흘 전 후보들간 텔레비전 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국가정보원 여직원의 댓글 의혹을 제기하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댓글은 인터넷에 쓴다. 댓글을 쓰고 ‘내문서’ 폴더에 저장하는 게 아니다. 박 대통령도 댓글 증거는 캡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경찰청은 김하영씨의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분석했다. 분석팀은 하드디스크에서 인터넷 활동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40개의 아이디와 30만건의 인터넷 접속기록을 확인했다. 수사는 인터넷으로 옮겨가는 게 맞다. 그런데 경찰은 인터넷 수사는 하지 않고, 텔레비전 토론 직후 ‘국정원 직원 불법선거 운동 혐의사건 중간 수사 결과’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어 ‘디지털 증거분석 결과,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비방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유권자는 이런 발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국정원 직원한테 아무런 선거운동 혐의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 건 당연했다.
서울경찰청은 분석팀의 하드디스크 분석 의견만을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로 발표했다. 그것도 대선 후보 토론이 끝난 밤 11시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인터넷 수사 단서를 발견한 사실을 보고받고도 ‘혐의사실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인정했다.
사안은 단순하다. 경찰이 댓글 수사를 했다고 하면서 댓글을 찾는 수사 범위를 노트북으로 한정한 게 문제다. 댓글을 노트북 하드디스크에서 찾다니, 이건 코미디다. 그러고 나서 디지털 증거 분석의 의미와 수사기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한테는 마치 수사를 다 한 것처럼 ‘혐의 없다’고 했다.
이런 코미디를 지난 6일 김 전 청장에 무죄를 선고한 법원은 그대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분석팀이 국정원 직원의 노트북에서 발견된 아이디와 인터넷 접속기록 등 인터넷 수사 단서를 빼버린 이른바 ‘분석범위 제한’에 대해 “당시로서는 노트북에서 발견된 단서가 선거개입 혐의와 관련있는지 분석관들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재판부 말대로라도 경찰은 수사 발표를 하지 않거나, 설령 발표를 한다고 해도 ‘노트북에서 아이디와 접속기록이 나왔는데, 댓글 여부는 인터넷 수사를 더 해봐야 한다’고 분명히 의미를 밝히는 게 정상이다.
경찰은 왜 허위 내용을, 대선 후보 토론 직후 심야시간에 갑자기 발표했나. 이것이 핵심이다. 김 전 청장한테 대선 개입 의도가 있었는지 판단하려면 이 대목을 비켜갈 수 없다. 그런데 재판부는 “발표 내용과 시기에 아쉬움이 든다. 분석의 범위와 관련된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 이를 기초로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음을 밝히는 등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었다”라고만 말했다. 사건의 핵심을 뭉개고 빠져나간 것이다. ‘왜 경찰이 분석 범위와 쟁점을 부각시키지 않고 수사가 확대될 여지를 잘랐는지’라는 의문에 대해, 법원은 “아쉽다”는 말만 했다. 108쪽에 이르는 판결문에는 핵심 의문에 대한 설명이 없다.
반면 재판부는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권 과장은 서울경찰청 바깥에 있었던 사람이다. 수사 결과 발표 내용과 시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권 과장은 배제됐다. 공소사실 핵심과 권 과장은 직접 관련이 없다. 재판부는 김 전 청장에게 무죄 판결을 하면서 곁가지 사안인 영장신청 보류, 분석물 반환 지연 등에 대한 권 과장과 17명의 경찰의 말이 달라서 권 과장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17명의 경찰 대부분은 검찰에서 피의자 신문을 받았다. 진술의 질을 따지지 않고, 17 대 1이라는 산술적 기준을 무죄의 핵심 근거로 적용했다.
김 전 청장에 대한 무죄 판결로 대선 직전 이뤄진 경찰의 허위 수사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새가 됐다. 왜 경찰이 한밤중에 그런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는지 의문도 풀리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에서 의문이 풀리길 기다린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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