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도 인권이다] 다른 나라에선 어떻게
사람에게 강제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도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식별번호 수집·이용도 엄격하게 운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인 주민등록번호제도와 달리 외국에선 정보인권을 존중하면서도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편의보다 시민의 인권을 중시하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프랑스는 중앙주민등록시스템(NIR)을 운영하며, 자발적으로 등록하는 개인에게 ‘신분증 번호’를 발급한다. 번호는 발급연도, 발급월, 지역번호 각 2자리씩과 일련번호 6자리까지 모두 12자리 숫자로 구성돼 있다. 번호는 사람이 아닌 신분증에 붙여지는 것이다. 신분증을 새로 발급할 때마다 번호는 바뀐다. 프랑스 정부는 이 번호를 다른 정보와 연결해 축적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16살 때 신분증을 발급받고 의무적으로 소지해야 한다. 신분증에는 일련번호가 적히지만, 프랑스처럼 사람이 아닌 신분증의 번호일 뿐이다. 신분증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10년마다 재발급받아야 하고 이때 번호는 새로 부여된다. 또 일련번호에 성별·나이 등 개인정보는 담기지 않는다. 신분증 발급의 바탕이 되는 ‘신분증법’에서는 민간은 물론이고 공공기관도 전산의 편의를 위해 신분증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국경관리를 맡는 부서와 관세청 등만 엄격한 조건 아래 예외로 인정받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무작위로 작성된 10단위의 숫자와 1단위의 식별 숫자로 조합된 11단위의 주민표 코드를 갖는다. 이 주민표 코드는 시·정·촌 등 기초자치단체의 장이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데 이외에는 이용할 수 없다. 그러나 시·정·촌장들도 해당 주민 이외의 사람들에게 주민표 코드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미국에서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식별번호는 없다. 다만 사회보장번호(SSN)가 개인이 신청하는 경우 주어진다. 사회보장번호는 우리나라의 주민번호처럼 거의 사회 전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범죄에 번호가 이용될 경우 바꿔 받을 수 있다. 번호는 9자리 숫자로 구성되는데, 번호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어 개인의 특성을 유추할 수 없게 돼 있다.
포르투갈처럼 아예 헌법에서 개인식별번호를 두는 것을 금지하는 나라도 있다. 포르투갈 헌법 제35조 3항은 “모든 국민에게 단 하나의 고유번호를 할당하는 행위를 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2011년 ‘주민증 발행번호’라는 대체 수단을 도입하려고 했었다. 주민등록번호와 별도로 주민등록증에 번호를 붙이고, 주민번호는 비공개하는 대신 대외적으로 발행번호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도입하려던 전자주민증의 인권침해 우려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아울러 주민등록번호를 둔 채 발행번호를 도입해봤자, 발행번호를 거쳐 주민번호를 확인할 수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김영홍 정보인권국장은 “당시 정부의 시도는 전자주민증 안에 기존 주민번호를 숨기고 주민증 번호를 새로 발급한다는 것으로, 기존 주민번호제 자체는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효실 이재욱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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