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일 저녁 민주노총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 앞에서 시민들이 영화 <레미제라블> 삽입곡을 부르는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콰르륵. 장갑차 궤도바퀴가 아스팔트 도로를 훑고 지나가면서 거친 파열음을 냈다. 2008년 10월1일 오후, 국군의 날을 맞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 현장에 서 있었다. 이날 취재 대상은 장갑차와 군부대 행렬이 아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군대 폐지를 주장해온 대학생 강의석(당시 22살)씨가 이곳에서 군대 반대 기습시위를 벌이겠다며 기자들에게 미리 알려왔기 때문이다. 장갑차가 삼성동 테헤란로에 접어들 무렵, 기자를 포함해 경찰들은 고개를 한참 돌려 주변을 살펴야 했다.
행렬 맨 앞에 선 장갑차가 서울 삼성동 현대백화점 근처를 지날 무렵, 알몸을 한 강씨가 어디선가 뛰쳐나왔다. “다다다다다!” 4차선 대로 한가운데에 선 그는 소총 모양으로 만든 과자를 장갑차를 향해 겨눴다. 그 뒤 그 자리에서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도로 가장자리에서 모포를 들고 뛰쳐나온 경찰들이 강씨를 끌어내면서 그의 시위는 30초 만에 끝났다. 경찰 조사에서 강씨는 “이날 새벽부터 테헤란로 중앙분리대 화단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12시간 동안 숨어서 퍼레이드 행렬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는 공연음란죄와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을 피하기 위해서
국내에서는 흔치 않던 알몸시위는 사실 ‘고전적인’ 시위 방식 가운데 하나다. 오래전부터 해외에서는 동물보호단체·환경단체 등이 채식 장려, 모피 반대 등의 시위에서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알몸시위를 해왔다. 또한 ‘알몸=자연·평화’라는 메시지도 명확하다. 국내에서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인 2010년 11월9일 오후, 서울 삼성동에서 또 한 번 기습 알몸시위가 있었다.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PETA) 회원인 한 캐나다인과 동물사랑실천협회 회원 한아무개씨가 코엑스 앞 네거리에서 속옷만 입고 온몸을 파란색으로 칠한 채 ‘지구를 지켜주세요, 채식주의자가 되어주세요’라고 쓴 팻말을 들고 채식을 호소하는 알몸시위를 벌였다.
국내 시위문화가 좀더 다양해진 건, 김대중 정부 이후 시위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사라지면서다. 물론 과거에도 ‘이색 시위’를 향한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경찰의 강경 시위 진압을 피하거나 집회 참여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겨레>에도 보도된 1994년 12월 경기도 산본시 주민들의 ‘냄비시위’가 그렇다. 당시 쓰레기 소각장 건설 예정지 주변 아파트 주민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건설 계획에 반대하며 자녀의 ‘등교 거부 운동’ 등을 벌였다. 방학이 시작된 뒤에는 항의 표시로 각자 집에서 가정용 냄비를 두드리는 ‘소음시위’를 벌였다. 당시 투입된 경찰의 무차별 연행을 피하기 위해 아파트 베란다에서 불을 끈 채 냄비를 두드렸다. 그렇게 참가자가 늘면서 주민들은 매일 밤 9시30분 아파트 앞 공터에서 항의집회를 진행했다.
1998년에는 여성들의 길거리 흡연이 이색 시위로 알려지기도 했다. 아마추어 영화창작모임 ‘파적’이 여성의 흡연권을 제안하기 위해 1998년 3월15일 서울 이화여대 정문에서 신촌 사거리까지 2km 구간에서 20~30대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서 거리행진을 하는 시위를 했다. ‘길거리 흡연’ 규제가 늘어나는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시위 참가자들이 ‘즐기는’ 시위 방식이 등장한 건, 촛불집회와 연관이 깊다. 2009년 9월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지만, 당시 촛불집회가 등장한 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서 정하고 있는 ‘야간 옥외집회 전면 금지’ 조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효순 학생의 추모집회를 위해 시작된 촛불문화제는 기존과 다른 평화적인 집회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 2000년 12월4일, 재벌의 불법 증여에 대한 과세를 요구하며 윤종훈 회계사가 서울 수송동 국세청 앞에서 벌인 최초의 ‘1인시위’도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
캠핑 열풍 전 시청 광장 ‘72시간 모꼬지’
개성 넘치는 시위 방식이 등장한 건,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이뤄지면서였다. 석 달 넘게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촛불집회는 말 그대로 다양한 시위 방식이 나타난 ‘난장’이었다. 특히 기존 시민단체·노동조합 등이 주도하는 조직화된 시위가 아니었던 덕에, 집회 초기에는 다양한 형식의 집회가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육아 관련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긴 ‘유모차부대’는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면서 촛불집회 거리행진에 참여했다. ‘캠핑 열풍’이 불기 전이던 2008년 6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72시간 국민 모꼬지’가 진행되면서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텐트를 치고 지내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 밖에 촛불집회 현장에 출동한 의경의 옷과 경찰 호송버스에 ‘평화의 상징’으로 꽃을 꽂아주는 캠페인, 인디밴드 등의 즉석 거리 공연, 집회 참가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식의 참여는 이전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시위 방식의 진화는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만나면서 ‘재미’와 ‘참여’를 더하고 있다. 대중이 인터넷 등을 중심으로 희망버스 참가자로 나서거나, 고공농성 현장에 지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참여였다.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점령하라’(오큐파이) 집회가 서울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팬들 사이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던 정봉주 전 의원을 응원하는 ‘비키니 인증샷 시위’도 SNS를 기반으로 확산됐다. 최근에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문제에 항의하면서 서울 내곡동 국정원 앞에서 캠핑장 퍼포먼스를 하는 시위가 SNS를 통해 알려졌다. ‘서울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국정원 국민감시단’ 소속 회원 3명은 지난해 여름 국정원 입구에서 텐트 등을 펼쳐놓은 채 먹고 자며 생활하는 ‘국정원 감시 캠핑’을 진행했다.
새로운 시위를 집시법으로 옭아매려는 시도도 그치지 않는다. 청년유니온이 서울 명동에서 반값 등록금 실현 등을 외치며 진행한 ‘플래시몹’(불특정 다수가 특정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약속된 행동을 한 뒤 순식간에 흩어지는 것)에 대해 지난해 3월 대법원이 내린 판결이 그렇다. 재판부는 “플래시몹 방식으로 집회를 열더라도, 정치·사회적 주장을 대외에 알리는 모양을 띠었다면 집시법에 따라 사전신고를 해야 한다”며 집시법에서 규정한 집회의 범위를 확대했다. 정치·사회적 주장이 없는 길거리 플래시몹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이들을 어떻게 옭아맬 텐가
그러나 변화하는 시위대에게는 집시법조차 풍자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해 12월28일 철도 민영화를 추진하는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면서 시작한 ‘레미제라블’ 플래시몹이 그렇다. 도심에서 영화 <레미제라블> 삽입곡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한국말로 바꿔 부른 뒤 헤어지기로 약속한 이 플래시몹은 SNS에서 한 여고생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트위터·페이스북 등을 통해 빠르게 퍼진 이 계획은 결국 서울 등 5개 도시에서 일제히 벌어졌다. 검정 옷에 빨간 소품을 착용하고 모인 참가자들이 2분 동안 노래만 부른 뒤 모래알처럼 흩어지면서 말이다. 자, 이들을 어떻게 옭아맬 텐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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