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한 지 50돌이 되었다. 50년 전 파병되어 사이공에서 평양으로 납치된 뒤 ‘탈영·월북자’로 조작되었다가 반쪽짜리 명예만 되찾은 ‘공식 국군포로 1호’ 고 안학수 하사의 가족들은 나머지 반쪽 명예회복을 바란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진실한 시인과 사과다. 사진 왼쪽부터 안학수 하사(왼쪽)가 1966년 7월경 근무지인 붕따우의 제1이동외과병원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붕따우의 한 성당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 사진관에서의 촬영. 사진 안용수씨 제공,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끝나지 않은 ‘탈영·월북 조작’ 드라마
안학수 하사의 진실과 동생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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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수 하사의 진실과 동생의 투쟁
“원통하여 눈을 못 감겠으니, 민원을 해결하라.”
13년 전인 2001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 한마디를 유언처럼 남겼다. 안용수(62)씨는 아버지의 말씀을 곱씹으며 새해를 맞는다. 올해는 특별하다. 베트남 파병 50주년. 둘째 형 안학수(1943년생, 당시 21살) 하사가 제1차 파병단의 일원으로 부산항을 떠난 지 만 50년 되는 해다. 둘째 형의 그 엄청난 사건. 반세기가 흘렀지만 상처는 온전히 씻기지 않았다.
1966년 9월9일. 제1이동외과병원 통신병 안학수 하사가 사라졌다. 귀국을 일주일 앞둔 채였다. 붕따우에서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 현 호찌민)으로 출장을 나갔다 자취를 감췄다. 어디로 갔는가. 책임 있는 답변을 해주는 이 없었다. 한국의 가족들은 애간장이 탔다. 한달, 두달, 석달, 넉달, 다섯달, 여섯달. 안학수 하사는 평양 대남방송에 나타났다. 1967년 3월27일. “미군들의 담배꽁초를 줏어피우다 김일성 수령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무한히 행복하다”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실신했다.
사이공에서 어떻게 평양으로? 베트남전의 공포가 한반도 분단의 비극과 하나가 되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낙인 앞에서 가족들은 전율했다. 하나씩 잃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연좌제라는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왔다. 포항 동부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는 횡성의 학습교재창 임시노무원으로 강제취업당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넷째 아들 안용수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에 끌려다니며 고문당했다.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국가고시도 볼 수 없었다. 교사로 일했지만 그마저도 금세 잃었다.
안씨는 작은 수첩 하나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안간힘이 그곳에 담겨 있다. 둘째 아들이 베트남에서 보내온 편지와 사진이 붙어 있다. 베트남전 실종 군인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 조각이 스크랩돼 있다. 생전에 아버지는 청와대와 기무사와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수십 차례 민원을 제출했다. 아들은 월북할 리 없었다. 안타깝게도 숨을 거둘 때까지 결정적 증거를 얻지 못했다. 30년 넘은 노력이 허망해 보였다. 안씨는 다시 벽을 두드렸다.
2008년, 기적이 찾아왔다. 진실이 드러났다. 형은 탈영하지 않았다. 월북하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 납북당했다. 1975년 북부 국경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됐다. 사형장에서 총살당했다. 정부는 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파병 1호였던 안학수 하사는 유일한 베트남전 국군포로 1호로 공식 인정받았다. 끝이 아니었다. 안용수씨는 2014년 1월2일에도 국정원 앞으로 가 1인시위를 했다. 무엇이 아직도 원통한 걸까.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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