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기획] 철도 민영화, 뒤늦은 후회
정상궤도 엇나간 영국 철도
500km 이동하는 데 5시간 걸려
같은 거리 서울~부산KTX 비교하니
일반석이 5~6만원대, 3시간 소요
영국 철도 질 떨어지고 가격 비싸
영국 정부가 오랜 동안 철도 인프라 투자에 소홀한 탓에 고속철도가 도버-런던의 짧은 구간에만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구간은 고속철도가 아니다. 그러니 한국과 견주면, 영국 철도의 질은 떨어지고, 가격은 턱없이 높은 셈이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의 나라, 영국의 철도가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이곳의 어처구니없는 열차표 가격을 설명하려면, 결국 영국 보수당이 이끈 철도 민영화를 짚을 수밖에 없다. 1992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보수당 정권은 철도 민영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듬해 철도법이 의회를 통과해, 1994년 4월부터 영국 철도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화물운송회사 3곳, 여객운송회사 25곳, 차량임대회사 3곳, 철도시설 관리회사 13곳 등이 영국의 철도를 나눠서 운영하게 됐다. 선로 등 철도 인프라는 ‘레일트랙’이라는 회사에 넘어갔다. 처음에는 그럴 듯해 보였다. 특히 레일트랙사는 민영화 5년차인 1998년에 영업이익 4억7100만파운드(8200억원)를 남기며 승승장구했다. 문제는 이듬해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9년 10월 런던 패딩턴역에 가까운 철도 구간에서 열차가 충돌해 31명이 죽고, 520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이듬해 사고가 다시 터졌다. 2000년 10월 남동부 해트필드 지역에서 열차가 탈선해 네명이 죽고 70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레일트랙의 과실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레일트랙이 낡은 선로를 방치한 탓에, 열차의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선로가 300조각으로 부서져 열차가 탈선한 것이 원인이었다. 레일트랙은 다른 회사에 책임을 떠넘기려 했지만, 줄을 잇는 소송까지 외면할 수 없었다. 단기 이윤에 급급하다 사고를 쳐버린 회사는 정부에 손을 벌렸지만, 정부도 외면했다. 결국 레일트랙은 법정관리를 받게 됐다. 정부의 무책임한 행태를 두고 여론이 부글거리자, 당시 스티븐 바이어스 교통부 장관은 “레일트랙을 인수할 새 회사는 주주의 이익보다는 철도여객의 이익을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받았다. 그렇지만 돈이 되지 않고, ‘철도여객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업을 넘겨받을 자본이 있을 턱이 없었다. 2002년 6월, 레일트랙사는 정부가 보증을 서는 비영리업체인 ‘네트워크 레일’에 인수됐다. 영국 정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뒤에야, 철도 인프라만이라도 재공영화하는 수순을 밟았다. 무모한 철도 민영화는 운임도 끌어올렸다. 지난해 1월 <비비시>(BBC)가 철도 민영화 20돌을 맞아 보도한 내용을 보면,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영국의 물가가 65% 오른 것에 견줘,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의 기차 일반 운임은 208%, 에딘버러까지는 134%, 엑스터까지는 205%가 올랐다. 다른 대부분 지역으로의 운임도 물가 상승률을 비웃으며 훨씬 더 많이 뛰어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 철도의 정기권 운임은 상대적으로 적게 올랐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런던-맨체스터 구간 정기권 요금 인상률이 65%였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정기권 요금 인상률도 100% 이내 수준이다. 영국 안에서도 철도 민영화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 수치를 강조하며 민영화의 효과로 선전한다. 하지만 정작 정기권 운임 가격이 ‘합리적’으로 오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실한 시장론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얘기겠지만, 영국 정부가 나서서 정기권의 가격을 통제한 탓이다. 실제로 2004년까지 영국 정부는 철도 정기권 가격을 규제 대상으로 삼고, 철도 운영 회사들이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값을 올리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정기권을 사용하는 통근자들은 열차표 가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다,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유권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2004년 이후 이 규제가 조금 느슨해졌지만, 정기권 가격은 여전히 통제 대상으로 남아 있다. 정기권의 ‘합리적인’ 가격은 민영화의 선물이 아니라, 정부 규제의 결과인 셈이었다. 반면, 정부 규제의 밖에 남겨진 일반 운임은 폭증했다. 철도 민영화가 영국 정부의 부담을 던 것도 아니었다. 영국 정부가 2013년 12월 내놓은 ‘교통 통계’ 자료를 보면, 철도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민영화 이후 오히려 꾸준히 증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가 상승분을 고려해 재환산한 액수를 기준으로 보면, 민영화 이전인 1987/1988년 회계연도에 12억파운드(2조1000억원)를 지원한 영국 정부는 정작 2012/2013년에는 51억파운드(8조8000억원)를 철도 산업에 지원한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고). 영국 정부의 부담이 오히려 네배 넘게 늘었다.
1993년 민영화뒤 열차 충돌·탈선
대형참사로 35명 사망·590명 다쳐
운임은 물가상승률 2배이상 껑충
보수당 뒤늦게 “실수” 인정
대처도 철도 민영화는 반대 영국 공영방송인 <비비시>마저도 2013년 1월 보도에서 “철도 인프라와 관련해 영국이 다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도 그렇게 많은 돈을 써야 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렸다. 반면, 같은 정부 자료에서 보여주는 민간 철도 회사들의 투자액은 2006/2007년(8조6000억 파운드)에서 2012/2013년(4조7000억파운드)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이 자료는 2005년 이전의 민간 철도 회사들의 투자 통계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정부가 나랏돈을 쏟아붓고 민간 회사들이 투자를 주저하는 동안, 철도 운행에서 나온 이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2013년 6월 영국 맨체스터대학 연구진이 영국노총의 의뢰를 받아 연구한 자료를 보면, 영국 내 5개 주요 민간 열차 회사들은 2007년부터 2011년 사이에 정부에서 30억파운드(5조2200억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 회사들은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5억파운드(8700억원)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영업이익 가운데 90% 이상은 주주들에게 배당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영국노총은 설명했다. 이렇게 정상 궤도에서 한참 엇나간 영국 철도의 상황에 영국 정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보수당은 2006년 아예 ‘반성문’을 내놓았다. 당시 야당인 보수당의 그림자내각 철도장관인 크리스 그레일링은 철도 관계자들과 만남에서 1990년대 보수당이 주도한 민영화는 “실수”였고, 그 때문에 열차 운임이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고 시인했다. 그는 “되돌아보면, 철도를 노선과 열차로 분할해 매각한 것은 바람직한 결정이 아니었다. 이런 식의 매각은 열차 운행을 위한 비용과 운임을 증가시켰다”라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철도 민영화 자체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민영화의 방식이 달랐어야 한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으로 풀이되지만, 보수당이 영국식 철도 민영화가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다. 영국 노동당은 아예 철도 재국영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2013년 6월 <업저버>는 마리아 이글 노동당 대변인의 말을 따서 재국유화가 영국 철도 개혁을 위한 “적절한 개혁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업저버>는 이 정책이 “노동당이 다음 총선에서 수백만명에 이르는 통근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풀이했다. 물론,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두배 가까이 늘어난 영국 정부의 부채를 고려하면 공약이 현실성을 갖기는 어려워 보인다. 노동당이 내년의 선거공약을 내기 전에 여론의 반응을 떠보려는 ‘언론 플레이’ 성격이 강해 보인다. 그렇지만, 노동당의 이런 ‘무리수’는, 열차값 인상에 대해 영국인들의 품고 있는 불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렇듯 공공 부문은 한번 민영화하면 문제가 불거져도 재공영화하기가 어렵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은 정작 철도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대처는 재임 기간에 버스·발전·가스·통신·공항 등 사실상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공 부문에서 민영화를 밀어붙인 것으로 악명 높지만, 정작 철도 민영화에 대해서는 “너무 나간 것”이라고 거북해했다. 철도 민영화가 대처가 물러난 뒤인 존 메이저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진 데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1993년 철도 민영화를 위한 철도법안에 대해서도, 정작 보수당 소속인 로버트 애들리 교통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런 사정 탓에 법안이 통과되는 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는 대처마저도 꺼린 분야에서부터 거꾸로 민영화가 시도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황혼기인 2010년대 한국의 정부와 집권당은, 정작 신자유주의의 절정기인 80~90년대 영국의 보수당보다 용감하고, 무모하다. 그래서 무섭다. 버밍엄/김기태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limpidkim@gmail.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