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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미국판 밀양’ 5년 갈등 끝에 송전탑 백지화

등록 2013-11-28 20:59수정 2013-11-29 11:49

천주교 사제와 수녀가 28일 낮 공사차량이 드나드는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 길바닥에 앉아, 평화를 위해 비를 맞으며 기도하고 있다. 서귀포/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천주교 사제와 수녀가 28일 낮 공사차량이 드나드는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 길바닥에 앉아, 평화를 위해 비를 맞으며 기도하고 있다. 서귀포/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동부 전력 공급 390㎞ 사업
주민 반대에 국가기관 중재
기존 선로 활용하기로 결정
21억달러 사업비도 7분의1로
경남 밀양 등 전국에서 갈등을 빚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밀양에서는 9년째 갈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면 미국 동부의 초고압 송전탑 건설사업인 ‘패스’는 주민의 반대와 공공기관의 중재로 5년여 만에 백지화됐다. 지난 10월 기획시리즈 ‘송전탑 갈등, 환경 불평등 문제다’를 통해 환경 정의의 관점에서 송전탑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제안한 <한겨레>는 대안을 찾아 미국과 독일 현지에서 심층 취재를 진행했다. 물리력을 앞세워 공사를 밀어붙이기만 하는 밀양의 현실과는 다른 해법이 그곳에 있었다.

지난 19일(현지시각) 오전 찾아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셰퍼즈타운은 늦가을 단풍을 곱게 품고 있었다. 제퍼슨 카운티에 있는 500가구 규모의 이 작은 마을은 포크 가수 존 덴버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아름다운 자연 그 자체였다. 수년간 파란에 휩싸였던 곳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마을은 평온했다.

이 평온한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한 건 2008년 가을부터였다. ‘패스’(PATH·Potomac Appalachian Transmission Highline) 사업 탓이었다. 총사업비 21억달러(2조2000억여원)를 들여 웨스트버지니아·버지니아·메릴랜드주를 가로질러 390㎞에 이르는 765㎸ 초고압 송전선을 설치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서부 오하이오밸리에서 생산한 전력을 워싱턴디시와 뉴저지주 등 동부연안의 도시들로 보낸다는 명분으로 시작했다. 동부연안 도시들의 전력수요가 늘어나 정전(블랙아웃)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5000㎿급 대규모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방안도 포함된 이 사업은, 민간 전력운영기관인 ‘피제이엠’과 그 회원사인 전력회사가 주도했다.

계획된 송전선은 셰퍼즈타운을 남북으로 갈랐고, 전력회사는 해당 지역 주택을 사들이려 했다. 19일 셰퍼즈타운에서 만난 케린 뉴먼(50)은 당시 마을 분위기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홀로 사는 이웃집 할머니가 ‘이곳에서 평생 살고 싶었는데 집을 팔아야 할 수도 있다니 슬프다’며 눈물을 흘리는 걸 봤어요. 그 눈물을 보고 반대운동을 시작하게 됐죠.” 평범한 주부였던 뉴먼은 이때부터 지난 6년여간 송전선 건설 반대 운동을 펼치며 풀뿌리 활동가로 거듭났다.

마을에는 이미 30m가량 높이의 나무기둥으로 된 138㎸ 송전탑과 36m 높이의 철제 500㎸ 송전탑들이 들어서 있었다. 전력회사는 기존 송전선과 60m 간격을 두고 765㎸짜리 송전탑들을 새로 놓으려 했다. 주민들은 전력회사가 주최하는 공청회 장소나 카운티 정부청사 앞에서 연일 반대 시위를 벌였다. 송전선 건설로 피해를 입는 주택·유적지·자연경관 등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어 뿌리고, 송전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전력회사는 이듬해인 2009년 셰퍼즈타운을 뺀 새로운 노선을 만들어 왔다. 이번엔 카운티 남쪽 지역을 가로지르는 모양새였다. 노선에 새로 포함된 지역 주민들도 들썩였다. 카운티 내 클로버데일 지역 주민인 70대의 낸스 브리스코는 “이 마을은 1987년에 생길 때부터 137가구가 함께 지역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데, 패스 계획대로라면 11가구가 없어져야 했다. 지역공동체 유지를 위협하는 행위여서 반대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카운티 주민 페이션스 웨이트(56)도 “초고압 송전선은 마을을 지나가는 고속도로와 같다. 지역에는 어떤 이익도 주지 않으면서 주민 희생만 강요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셰퍼즈타운이 빠졌지만, 뉴먼은 반대 활동을 멈추지 않고 카운티 내 다른 지역 주민들과 함께 풀뿌리 단체 ‘스톱 패스’를 결성했다. 피해 지역이 달라졌을 뿐 근본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피제이엠 등은 주민들에게 새로운 송전선이 필요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어요. 주민들은 송전선이 지나는 노선에 대한 의견만 내놓을 수 있는 존재로 취급했죠. 하지만 우리는 노선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새로 송전선을 짓는 계획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패스 사업에 따른 송전선이 지나는 다른 주에서도 반대하는 주민 단체가 생겨났고, 전국 규모 환경단체인 시에라클럽·지구정의 등도 패스 반대운동에 결합했다.

송전선의 설치 필요성 및 인체 유해성을 놓고 주민과 전력회사 사이에 공방이 벌어졌다. 논쟁은 2009년부터 각 주에 있는 공공사업규제위원회(또는 기업규제위원회)에서 본격 진행됐다. 미국에서 신규 송전선 건설 인허가권은 연방정부가 아닌 주정부에 있다. 사업자는 공공사업규제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위원회는 요청이 있을 경우 청문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뒤 결정을 내린다. ‘스톱 패스’에서 주민 모금으로 마련한 7만달러 중 대부분은 청문회를 위한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들어갔다.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주민 100~200여명이 ‘스톱 패스’가 만든 ‘패스 반대’ 스티커를 가슴에 붙인 채 공방을 지켜봤다.

청문회에서는 재산권 침해를 규탄하는 주민 진술부터 여러 분야 전문가의 견해가 모두 다뤄졌다. 전자기장 전문가인 컬럼비아대학의 마틴 블랭크 박사는 버지니아주 기업규제위원회가 연 청문회에서 전자기장과 백혈병·암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송전선을 지금 경로대로 지으면 지역 주민들의 건강이 위험하다”고 진술했다. 환경단체인 시에라클럽은 “패스 계획이 실현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연간 375만t에서 779만t으로, 아황산가스는 연간 6만7000t에서 8만8000t으로, 질소산화물은 연간 1만2000t에서 2만t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문가 견해를 담은 진술서를 제출했다.

공방이 가열되자 버지니아주 기업규제위원회는 자체적으로 전문가들을 고용해 만든 보고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서 25년 경력의 전력산업 분야 독립 컨설턴트이자 경제학자인 제임스 윌슨은 패스가 신뢰도·수요 측면에서 타당성이 결여된 사업이라고 분석했다. 윌슨은 “피제이엠이 패스 사업의 근거로 삼은 동부연안 지역 수요 전망치는 과장됐고 대안 분석도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피제이엠 쪽은 ‘2012년까지 완공하지 않으면 블랙아웃이 우려된다’고 주장했지만, 공방이 진행되면서 완공 시점을 2015년까지 늦췄다.

2011년 마침내 현실적인 대안이 등장했다. 지역의 다른 전력회사인 도미니언사가 기존 500㎸ 송전선의 용량을 66% 확대해 재건축하기로 한 것이다. 이 계획은 땅 28.33㎢를 필요로 했던 패스와 달리 추가로 토지가 필요하지 않았고, 비용도 3억~3억5000만달러로 패스의 7분의 1에 불과했다. 낡은 송전선을 고쳐 정전 위기도 비켜갈 수 있었다. 각 주의 규제위원회는 도미니언사의 계획을 승인하면서, 패스 담당 회사 쪽에 이 계획을 반영한 수정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피제이엠은 회원사인 전력회사에 패스 추진을 유예하라고 요청했고, 이듬해인 2012년 피제이엠 이사회에서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긴급히 추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를 들었다.

패스가 철회됐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전력회사들은 착공 전 주택 구매 등으로 수천만달러를 이미 지출했는데, 이 비용을 전기요금에 포함시켜 회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민간회사들이 송전선 투자에 들인 비용 중 일부를 회수할 수 있도록 2005년 에너지법을 개정했다. 뉴먼을 비롯한 반대 주민들은 미연방 에너지규제위원회에 회수 비용으로 낸 전기요금을 환불해달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뉴먼은 송전선 갈등을 빚는 미국의 다른 지역 주민들로부터 줄줄이 도움 요청을 받고 있다. “처음엔 나 자신과 옆집 이웃을 위해 나섰지만, 점차 우리 지역을 위해 싸웠고, 지금은 우리나라를 위해 행동해요. 이제 에너지 정책과 관련한 불평등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더 큰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목표입니다.”

셰퍼즈타운(미국)/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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