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팀 축구선수로 오랫동안 활약한 유상철씨를 지난 5일 그가 운영하는 서울시 송파구 ‘유상철 축구교실’ 인근의 카페에서 만났다. 유씨는 왼쪽 시력이 거의 없는 상태라며 마주하고 있는 사람도 오른쪽 눈으로 쳐다본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몸 / 나의 몸
⑬ 축구인 유상철의 눈
⑬ 축구인 유상철의 눈
▶ 우리 눈은 겉껍질인 각막과 조리개 구실을 하는 홍체, 필름에 해당하는 망막, 뇌에 이미지를 전달하는 120만개의 시신경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중 하나만 제대로 기능을 못해도 보는 데 지장이 있죠. 두 눈 중에 한쪽의 시력만 나빠져도 거리감각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물건을 쥐려다 손으로 허공을 그리기도 하죠.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이를 잘 극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유상철씨입니다.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유상철(42)씨에게는 2006년 선수생활을 마치기까지 혼자만 간직한 비밀이 있다. 그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이나, 지도했던 감독·코치, 트레이너조차도 전혀 알지 못했다. 바로 그의 왼쪽 눈의 시력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5일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서울시 송파구 ‘유상철 축구교실’ 근처 카페에서 만난 유씨는 “왼쪽 눈으로만 보면 윤곽만 어렴풋이 보인다. 추운 날 서리가 낀 유리창으로 밖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유씨의 비밀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시기는 은퇴 직후인 2006년 3월이었다. “어렸을 땐 왼쪽 눈이 안 보인다는 약점이 알려지면 축구를 더 이상 하지 못할까봐 말을 못했고, 한창 프로 선수로 뛸 때엔 상대팀 선수들이 제 약점을 악용할 우려가 있어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했어요. 사실 눈이 안 보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어요. 은퇴를 결심한 뒤에야 친한 사람들에게 처음 비밀을 털어놨죠.”
유씨가 왼쪽 눈의 시력을 비밀에 부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는 왼쪽으로 빠르게 지나는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다. 왼쪽을 볼 때도 오른쪽 눈을 사용한다. 눈동자만 돌려서 왼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과 사람을 놓치면 안 되는 축구선수로서는 상당히 큰 약점이다. 약점이 노출되면 상대편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 유씨가 비밀을 지킨 이유는 단지 약점을 숨기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몸의 약점보다 더 무서운 건 편견”
“내 몸의 약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들의 편견이에요. 축구선수가 여러 경기를 뛰다 보면, 안 좋은 플레이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럼 컨디션이 나빴다거나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털어버리면 돼요. 하지만 제 눈이 안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 실수를 하거나 좋은 기회를 놓칠 때 감독이나 팬들이 시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우려가 있어요. 괜한 오해를 받게 되면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식을 하게 되고, 실수를 떨치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마음을 강하게 먹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했어요.”
자신의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을 처음 알아챈 시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정확히 언제 눈이 나빠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신체검사를 받던 당시 당황스러웠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왼쪽 눈 잘 안 보였지만
선수로서 큰 약점이기에
은퇴할 때까지 비밀로 해 “한쪽 눈이 잘 안 보이면
공간 지각 능력 떨어지지만
미드필더·공격수로 활약한 건
나는 노력의 산물일 것” “시력검사를 할 때 숟가락으로 한쪽 눈을 가리잖아요. 오른쪽 눈을 가렸는데 갑자기 왼쪽 눈이 안 보이는 거예요. 오른쪽 눈 시력이 1.2였는데, 왼쪽 눈으론 시력검사판의 가장 큰 숫자도 보이지 않았어요. 너무 당황스러웠죠. 순간 이렇게 시력검사가 끝나면 축구를 못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꼼수로 숟가락을 약간 움직여 오른쪽 눈을 반만 가렸죠. 결국 왼쪽 눈도 시력이 1.2가 나왔어요. 그 이후로 매년 신체검사를 할 때마다 이런 수법을 썼어요. 어릴 땐 나중에 커서 프로팀 입단 때 피지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하기도 했죠.” 어린 유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수십군데의 안과를 찾아다녔다. 혹시나 왼쪽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좋다고 소문난 안과는 대부분 돌아다녔다. 의사의 진단은 늘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안 좋고, 이미 나빠진 시력은 다시 회복할 수 없다’였다. 그의 시력은 왜 나빠진 걸까. 유씨는 “병원에서 원인에 대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말만 또렷이 기억한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재완 센트럴서울안과 의사는 “유상철씨의 경우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왼쪽 눈 시력이 좋지 않았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처음 시력검사를 받을 때 발견했을 수 있다. 두번째 가능성은 약시다. 성장기에 특별히 눈 질환을 앓지 않고도 시력이 나빠지는 것을 약시라고 한다. 이는 안구가 커지면서 눈 안에 굴절되는 빛의 각도나, 상(image)이 맺히는 위치가 달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런 약시가 한쪽 눈에서만 진행되면 망막이나 시신경에 이상이 없이도 시력이 나빠질 수 있다. 이외에 시신경에 염증이 생길 경우에도 한쪽 눈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른쪽 눈마저 다칠 뻔했던 아찔한 순간 유씨가 축구선수를 하는 내내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걱정했다. 어머니는 운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지,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 눈마저 다치진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선수 시절 제 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부모님과 아내뿐이었어요. 특히 어머니는 제 눈을 몹시 걱정했죠. 제가 한창 국가대표 선수로 뛰고 있을 당시 하루는 어머니가 ‘내 눈을 너에게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화를 내며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해요. 제가 세 아이의 아빠잖아요. 만약 아이가 어디가 안 좋다면 내 장기라도 내주고 싶죠.” 잘 보이지 않는 한쪽 눈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특히 야간경기가 불편했다. 뜬 공을 보기 위해 눈이 경기장 조명을 향하면 잠시 동안 앞이 뿌옇게 보이거나, 거리감각이 떨어졌다. 그로 인해 수비해야 할 선수를 놓친 적도 있었다. 전문가들도 한쪽 눈의 시력이 나빠질 경우 운동능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주치의인 송준섭(서울제이에스병원장)씨는 “우리 몸에 두 눈이 있는 이유는 입체감 있는 영상을 그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한쪽 눈이 잘 안 보이면 거리감각과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물론 한쪽 눈으로도 사물의 크기 등을 통해 거리감을 파악할 수 있고, 개인의 노력에 따라 공간지각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유상철씨는 선수 시절 공간을 잘 활용해야 하는 미드필더와 위치 선정이 중요한 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했다. 아마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씨는 그나마 잘 보이는 오른쪽 눈마저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대학 시절 비가 오는 날 연습경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인조잔디 구장이 많지 않아 흙이 깔린 운동장에서 공을 찼어요. 그러다 공과 함께 튄 진흙이 오른쪽 눈에 들어갔죠.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어요. 급히 수돗가에 가서 씻어도 흙이 잘 안 빠지더군요. 순간적으로 이젠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덜컥 겁이 났어요. 다행히 나중엔 눈에서 흙을 빼고 정상적으로 회복했죠.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취약한 부분이 있으면 방어적으로 행동을 한다. 발목이 안 좋은 농구선수나 팔꿈치가 아픈 야구선수는 더 다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행동하는 게 보통이다. 유상철씨는 한쪽 눈으로만 보는데다, 이 눈마저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동은 반대였다. 축구선수로서 그는 상당히 거친 플레이를 했다. 덩치가 큰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도 피하지 않았고, 부상을 당한 상태로도 경기 출전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가 선수생활을 하면서 넣었던 결정적인 골들도 대부분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투지 넘치는 플레이의 결과였다.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에서 만난 일본을 상대로 그는 0-1로 끌려가던 중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최종 수비수였던 홍명보 현 국가대표팀 감독이 전반전에 부상당해 교체되자, 그는 최종 수비수 자리를 메우며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몸을 던지는 육탄 수비를 하면서도 공격에 가담해 동점골을 뽑았다. 결국 이 경기에서 한국팀은 3-2로 역전승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선 한국팀을 벼랑 끝에서 건져올린 골을 기록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멕시코, 네덜란드를 상대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이며 완패하자,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도중에 경질되고 감독 없이 벨기에전에 나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국팀은 경기 초반부터 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하지만 경기를 20여분 남기고 왼쪽에서 날아온 프리킥을 그가 번개처럼 뛰어가 골로 연결했다. 왼쪽 눈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왼쪽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놓치지 않고 골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한·일 월드컵을 1년 앞두고 열린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에서 전반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후반전에 출전을 강행해 헤딩으로 결승골을 기록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왼쪽 눈”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유씨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그는 원조 ‘멀티플레이어’(축구에서 여러 포지션을 잘 소화하는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관찰력 덕분이라고 밝혔다. “어릴 적부터 한번 본 것을 거의 그대로 그릴 수 있을 만큼 관찰력이 좋았어요. 축구를 할 때도 여러 포지션에 있는 선수들을 눈여겨봅니다. 중앙 수비수를 보면서 속으로 저렇게 방어를 하고 공을 걷어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면 어떻게 할지를 상상해요. 측면 공격수나 중앙 미드필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식으로 선수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면, 내가 그 역할을 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실제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1997년까진 소속팀인 울산 현대에서 미드필더로 뛰다가 1998년엔 최전방 공격수로 변신했다. 소속팀 감독이 공격진의 부진을 고심하다가 그를 공격수로 전격 기용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결국 그해 득점왕의 주인공이 유상철이었다. 그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일본 프로팀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도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대표팀에선 미드필더를 주로 맡았고, 경우에 따라선 최후방 수비수를 맡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종료 20여분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수비수였던 홍명보·김태영·김남일을 빼고, 공격수인 이천수·차두리·황선홍을 투입했다. 당시 최후방 수비를 그가 맡았다. 대표팀은 당시 그를 최후방에 남겨두고 전원 공격을 했고, 결국 후반 44분에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냈다. 유씨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것으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크지 않다고 했다. 가끔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못 알아볼 때가 있고, 계속 오른쪽 눈을 사용하다 보니 피로감 때문에 노안이 조금 일찍 온 것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이라고 전했다. 40대 초반의 나이인데도 가까운 곳에 있는 글씨나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글씨를 읽기 위해 종이를 든 손을 뻗었다. 운전을 할 때도 오른쪽 눈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남들과 왼쪽 백미러를 보는 각도가 다르다고 밝혔다. 그는 “가끔 대리기사를 부르면 오른쪽 백미러는 그냥 놔두는데 항상 왼쪽 백미러는 조절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을 마주할 때도 왼쪽 눈이 아닌 오른쪽 눈으로 상대의 눈을 쳐다보고, 왼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쳐다볼 땐 눈동자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아예 돌려서 쳐다본다. 유씨처럼 한쪽 눈의 시력이 지나치게 안 좋을 경우 장애등급을 받기도 한다. 두 눈 중에 한쪽이라도 시력이 0.02보다 낮은 경우 장애 6등급에 해당된다. 유상철에게 왼쪽 눈이란 어떤 존재일까. 그는 “오늘의 자신을 만든 것이 왼쪽 눈”이라고 표현했다. 잘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해 선수생활에 지장을 준 왼쪽 눈이 지금까지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왼쪽 눈이 완전히 실명 상태가 아니라, 윤곽이나마 희미하게 보이는 상태니까 감사하죠. 그렇지 않았으면 축구선수를 하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또 약점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강점이 만들어졌어요. 박지성 선수의 강점은 지구력과 집요한 플레이잖아요. 아마 박지성 선수도 ‘평발은 지구력이 약하다’는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 지금의 장점을 가졌을 가능성이 커요. 저도 마찬가지죠. 시력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체력을 키웠고, 몸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한쪽 눈으로도 헤딩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고등학교 때부터 기둥에 공을 매달아 높이를 조절하며 연습을 숱하게 했죠. 그렇게 한 결과 선수생활을 하면서 발로 넣은 골보다 머리로 넣은 골이 더 많아요.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약점과 절망스러운 경험이 있을 수 있어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직업적 특성상 약점을 솔직히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사실 자신의 약점이나 아픔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도 방법이죠.”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왼쪽 눈 잘 안 보였지만
선수로서 큰 약점이기에
은퇴할 때까지 비밀로 해 “한쪽 눈이 잘 안 보이면
공간 지각 능력 떨어지지만
미드필더·공격수로 활약한 건
나는 노력의 산물일 것” “시력검사를 할 때 숟가락으로 한쪽 눈을 가리잖아요. 오른쪽 눈을 가렸는데 갑자기 왼쪽 눈이 안 보이는 거예요. 오른쪽 눈 시력이 1.2였는데, 왼쪽 눈으론 시력검사판의 가장 큰 숫자도 보이지 않았어요. 너무 당황스러웠죠. 순간 이렇게 시력검사가 끝나면 축구를 못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꼼수로 숟가락을 약간 움직여 오른쪽 눈을 반만 가렸죠. 결국 왼쪽 눈도 시력이 1.2가 나왔어요. 그 이후로 매년 신체검사를 할 때마다 이런 수법을 썼어요. 어릴 땐 나중에 커서 프로팀 입단 때 피지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하기도 했죠.” 어린 유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수십군데의 안과를 찾아다녔다. 혹시나 왼쪽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좋다고 소문난 안과는 대부분 돌아다녔다. 의사의 진단은 늘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안 좋고, 이미 나빠진 시력은 다시 회복할 수 없다’였다. 그의 시력은 왜 나빠진 걸까. 유씨는 “병원에서 원인에 대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말만 또렷이 기억한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재완 센트럴서울안과 의사는 “유상철씨의 경우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왼쪽 눈 시력이 좋지 않았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처음 시력검사를 받을 때 발견했을 수 있다. 두번째 가능성은 약시다. 성장기에 특별히 눈 질환을 앓지 않고도 시력이 나빠지는 것을 약시라고 한다. 이는 안구가 커지면서 눈 안에 굴절되는 빛의 각도나, 상(image)이 맺히는 위치가 달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런 약시가 한쪽 눈에서만 진행되면 망막이나 시신경에 이상이 없이도 시력이 나빠질 수 있다. 이외에 시신경에 염증이 생길 경우에도 한쪽 눈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른쪽 눈마저 다칠 뻔했던 아찔한 순간 유씨가 축구선수를 하는 내내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걱정했다. 어머니는 운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지,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 눈마저 다치진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선수 시절 제 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부모님과 아내뿐이었어요. 특히 어머니는 제 눈을 몹시 걱정했죠. 제가 한창 국가대표 선수로 뛰고 있을 당시 하루는 어머니가 ‘내 눈을 너에게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화를 내며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해요. 제가 세 아이의 아빠잖아요. 만약 아이가 어디가 안 좋다면 내 장기라도 내주고 싶죠.” 잘 보이지 않는 한쪽 눈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특히 야간경기가 불편했다. 뜬 공을 보기 위해 눈이 경기장 조명을 향하면 잠시 동안 앞이 뿌옇게 보이거나, 거리감각이 떨어졌다. 그로 인해 수비해야 할 선수를 놓친 적도 있었다. 전문가들도 한쪽 눈의 시력이 나빠질 경우 운동능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주치의인 송준섭(서울제이에스병원장)씨는 “우리 몸에 두 눈이 있는 이유는 입체감 있는 영상을 그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한쪽 눈이 잘 안 보이면 거리감각과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물론 한쪽 눈으로도 사물의 크기 등을 통해 거리감을 파악할 수 있고, 개인의 노력에 따라 공간지각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유상철씨는 선수 시절 공간을 잘 활용해야 하는 미드필더와 위치 선정이 중요한 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했다. 아마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씨는 그나마 잘 보이는 오른쪽 눈마저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대학 시절 비가 오는 날 연습경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인조잔디 구장이 많지 않아 흙이 깔린 운동장에서 공을 찼어요. 그러다 공과 함께 튄 진흙이 오른쪽 눈에 들어갔죠.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어요. 급히 수돗가에 가서 씻어도 흙이 잘 안 빠지더군요. 순간적으로 이젠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덜컥 겁이 났어요. 다행히 나중엔 눈에서 흙을 빼고 정상적으로 회복했죠.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취약한 부분이 있으면 방어적으로 행동을 한다. 발목이 안 좋은 농구선수나 팔꿈치가 아픈 야구선수는 더 다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행동하는 게 보통이다. 유상철씨는 한쪽 눈으로만 보는데다, 이 눈마저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동은 반대였다. 축구선수로서 그는 상당히 거친 플레이를 했다. 덩치가 큰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도 피하지 않았고, 부상을 당한 상태로도 경기 출전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가 선수생활을 하면서 넣었던 결정적인 골들도 대부분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투지 넘치는 플레이의 결과였다.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에서 만난 일본을 상대로 그는 0-1로 끌려가던 중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최종 수비수였던 홍명보 현 국가대표팀 감독이 전반전에 부상당해 교체되자, 그는 최종 수비수 자리를 메우며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몸을 던지는 육탄 수비를 하면서도 공격에 가담해 동점골을 뽑았다. 결국 이 경기에서 한국팀은 3-2로 역전승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선 한국팀을 벼랑 끝에서 건져올린 골을 기록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멕시코, 네덜란드를 상대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이며 완패하자,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도중에 경질되고 감독 없이 벨기에전에 나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국팀은 경기 초반부터 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하지만 경기를 20여분 남기고 왼쪽에서 날아온 프리킥을 그가 번개처럼 뛰어가 골로 연결했다. 왼쪽 눈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왼쪽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놓치지 않고 골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한·일 월드컵을 1년 앞두고 열린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에서 전반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후반전에 출전을 강행해 헤딩으로 결승골을 기록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왼쪽 눈”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유씨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그는 원조 ‘멀티플레이어’(축구에서 여러 포지션을 잘 소화하는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관찰력 덕분이라고 밝혔다. “어릴 적부터 한번 본 것을 거의 그대로 그릴 수 있을 만큼 관찰력이 좋았어요. 축구를 할 때도 여러 포지션에 있는 선수들을 눈여겨봅니다. 중앙 수비수를 보면서 속으로 저렇게 방어를 하고 공을 걷어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면 어떻게 할지를 상상해요. 측면 공격수나 중앙 미드필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식으로 선수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면, 내가 그 역할을 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실제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1997년까진 소속팀인 울산 현대에서 미드필더로 뛰다가 1998년엔 최전방 공격수로 변신했다. 소속팀 감독이 공격진의 부진을 고심하다가 그를 공격수로 전격 기용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결국 그해 득점왕의 주인공이 유상철이었다. 그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일본 프로팀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도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대표팀에선 미드필더를 주로 맡았고, 경우에 따라선 최후방 수비수를 맡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종료 20여분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수비수였던 홍명보·김태영·김남일을 빼고, 공격수인 이천수·차두리·황선홍을 투입했다. 당시 최후방 수비를 그가 맡았다. 대표팀은 당시 그를 최후방에 남겨두고 전원 공격을 했고, 결국 후반 44분에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냈다. 유씨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것으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크지 않다고 했다. 가끔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못 알아볼 때가 있고, 계속 오른쪽 눈을 사용하다 보니 피로감 때문에 노안이 조금 일찍 온 것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이라고 전했다. 40대 초반의 나이인데도 가까운 곳에 있는 글씨나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글씨를 읽기 위해 종이를 든 손을 뻗었다. 운전을 할 때도 오른쪽 눈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남들과 왼쪽 백미러를 보는 각도가 다르다고 밝혔다. 그는 “가끔 대리기사를 부르면 오른쪽 백미러는 그냥 놔두는데 항상 왼쪽 백미러는 조절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을 마주할 때도 왼쪽 눈이 아닌 오른쪽 눈으로 상대의 눈을 쳐다보고, 왼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쳐다볼 땐 눈동자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아예 돌려서 쳐다본다. 유씨처럼 한쪽 눈의 시력이 지나치게 안 좋을 경우 장애등급을 받기도 한다. 두 눈 중에 한쪽이라도 시력이 0.02보다 낮은 경우 장애 6등급에 해당된다. 유상철에게 왼쪽 눈이란 어떤 존재일까. 그는 “오늘의 자신을 만든 것이 왼쪽 눈”이라고 표현했다. 잘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해 선수생활에 지장을 준 왼쪽 눈이 지금까지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왼쪽 눈이 완전히 실명 상태가 아니라, 윤곽이나마 희미하게 보이는 상태니까 감사하죠. 그렇지 않았으면 축구선수를 하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또 약점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강점이 만들어졌어요. 박지성 선수의 강점은 지구력과 집요한 플레이잖아요. 아마 박지성 선수도 ‘평발은 지구력이 약하다’는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 지금의 장점을 가졌을 가능성이 커요. 저도 마찬가지죠. 시력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체력을 키웠고, 몸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한쪽 눈으로도 헤딩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고등학교 때부터 기둥에 공을 매달아 높이를 조절하며 연습을 숱하게 했죠. 그렇게 한 결과 선수생활을 하면서 발로 넣은 골보다 머리로 넣은 골이 더 많아요.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약점과 절망스러운 경험이 있을 수 있어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직업적 특성상 약점을 솔직히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사실 자신의 약점이나 아픔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도 방법이죠.”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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