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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이봐, 내겐 엄지손가락이 두 개나 있다고

등록 2013-06-07 19:39수정 2013-07-15 14:32

지난달 29일 경남 진주시 칠암동의 ‘히말라야 아트 갤러리’에서 산악인 박정헌씨가 2011년 8월 히말라야 횡단 당시 탔던 패러글라이더에 앉아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그리고 있다. 박씨가 운영 중인 이 갤러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네팔의 건축물과 문화를 소개하는 곳이다.
지난달 29일 경남 진주시 칠암동의 ‘히말라야 아트 갤러리’에서 산악인 박정헌씨가 2011년 8월 히말라야 횡단 당시 탔던 패러글라이더에 앉아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그리고 있다. 박씨가 운영 중인 이 갤러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네팔의 건축물과 문화를 소개하는 곳이다.
[토요판/몸]
나의 몸 <2> 산악인 박정헌의 손
▶ 사람의 손은 척골과 요골(두 개의 손목뼈)을 포함해 모두 29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대와 힘줄이 이 뼈들을 서로 묶어주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합니다. 산악인 박정헌씨는 8000m급 히말라야의 암벽을 두 손으로 잡고 오르던 유명한 ‘알피니스트’였습니다. 동상으로 여덟 손가락을 잃은 그의 이야기는 소설로도 나올 만큼 드라마틱합니다. 손을 잃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는 박씨에게 손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히말라야 촐라체 정상 오르고
하산하다 조난된 2005년 1월
동상으로 여덟 손가락을 잃었다
그는 장애 4등급을 얻고
산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산 잃은 상실감 술로 채웠지만
자전거로 실크로드 횡단하고
히말라야 패러글라이딩하며
손의 의미를 재발견 중이다
“몸이 생각 지탱해준다기보다
열정이 몸 버티게 하는 거예요”

연필을 쥐고 글씨를 적는다.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고 책장을 넘기고 타자를 친다. 밥을 먹고 악기를 연주한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의 떨림을 따라 손목, 팔목, 어깨가 따라 조금씩 흔들린다.

당신의 손이 움직인다. 정교하고 세련되고 역동적이다. 때론 애정의 시간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자기를 방어하거나 분노와 좌절감에 상대를 공격할 때도 있다. 복잡한 손동작은 영장류만이 할 수 있는 진화의 선물이다. 그래서 손을 ‘밖에 나와 있는 뇌’라고도 부른다.

“히말라야는 내게서 여덟 손가락을 가져간 대신 진정한 자유를 주었다.”

지난달 29일 경남 진주시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히말라야 아트 갤러리’에서 산악인 박정헌(42)씨를 만났다. 그는 히말라야 거벽 등반가였다. 안나푸르나 남벽(8091m·199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8848m·1995년), 초오유(8201m·1996년), 낭가파르바트(8125m·1997년), 케이투(K2) 남남동릉(8611m·2000년 무산소 등정), 시샤팡마 남서벽(8012m·2002년 코리안루트 개척), 겨울철 촐라체 북벽(6440m·2005년)을 올랐다.

손바닥은 검붉어지고, 손가락 끝은 건포도처럼…

박씨는 정상에 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산을 오르느냐를 중시하는 등로주의, 알피니스트(등산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며 산에 도전하는 사람들)였다. 2005년 1월13일 출발해 16일 촐라체 정상을 오른 뒤 하산하던 중 로프로 서로의 몸을 묶은 동료가 크레바스(빙하나 설계에 균열이 생겨 갈라진 틈새)에 빠지면서 함께 조난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그는 촐라체에서 동상으로 엄지손가락 두 개를 제외한 여덟 손가락을 잃었고 산악인의 삶도 중단됐다.

그를 만나기 전, 산악인이 대표하는 신체는 ‘발’이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산악인은 늘 국기를 흔들며 정상을 ‘밟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알피니스트의 대답은 달랐다.

“산에서는 손이 가장 중요합니다. 발은 기본적인 밸런스만 유지하는 것이고요, 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바위 모서리를 잡고 신체를 지탱하는 일도, 빠르게 하켄(바위의 갈라진 틈에 박는 암벽 등반용 못)을 박고 자일(등산용 밧줄)을 걸고 피켈(빙벽이나 눈 사면을 오를 때 사용하는 지팡이처럼 생긴 장비)을 쥐는 일 모두 손가락이 하는 일이에요. 산 타면서 손가락이 고생했죠. 주인 잘못 만나서 험한 일 많이 한….”

박씨의 손가락을 삼킨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의 보금자리’라는 뜻이다. 히말라야의 원주민들은 동상을 ‘눈이 손가락을 먹는다’고 표현한다. 박씨의 여덟 손가락은 손바닥에 가까운 한 마디씩만 남은 상태다. 직접 만져본 박씨의 손가락 끝에서 뭉뚝하게 잘린 듯 뼈가 바로 느껴졌다. 이식한 피부가 망치처럼 손가락 끝을 감싸고 있었다. 원래 손가락보다 검은 피부가 이식한 새살을 구분해줬다.

당시 구조상황을 담은 영상물에서 확인한 박씨의 손은 숯에 손가락을 푹 담갔다가 꺼낸 듯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는 베테랑 알피니스트였고 히말라야의 변화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부딪힌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겨울철 촐라체에는 해가 들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데다 조난까지 당해 오래 추위에 노출된 박씨는 동상을 피할 수 없었다. 박씨가 말했다.

“피켈로 벽을 때리면서 올라갈 때 벽에 네 손가락이 부딪히는 거예요. 영하 20도 추위에다가 충격까지 받는 거죠. 출발한 지 3일째인가부터 손이 아파 구부릴 수가 없더라고요. 며칠을 젖은 장갑 하나만 끼고 버텼으니… 손바닥은 검붉어지고 손가락은 이미 까맣게 변해 있었어요. 건포도처럼 손가락 끝부터 말라가던 중이었어요.”

손가락을 절단한다는 의미는 어떤 슬픔과 공포일까. 그는 산에서 축적한 경험과의 이별이라고 말했다. 산악인에게 몸은 그 자체로 경험으로 익힌 기술의 축적이었고, 손가락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정밀기계였다.

“고생 끝에 목표한 산을 오르면 그 산은 나침반처럼 다음 방향을 가리킵니다. 촐라체를 오르고 나서야 쌓일 수 있는 기술과 기억이 있어요. 그러면 또 다음 산으로 가서 또 다른 걸 배우는 거예요. 그런데 손을 보니 재생될 상태가 아니었죠. 수용해야 했어요.”

자신이 쓴 책 <끈>에 사인을 하고 있는 박정헌씨의 손.
자신이 쓴 책 <끈>에 사인을 하고 있는 박정헌씨의 손.
제육감과 환상통, 그리고 요술공주의 악몽

서울로 돌아온 뒤 서울 경희의료원 정형외과 정덕환 교수가 그의 손을 수술했다. 괴사한 손가락 피부나 조직은 제거하고, 팔뚝에서 혈관을 부착한 피부판을 옮겨와 이식하는 ‘유리피판이식술’이었다. 팔뚝에 있는 큰 혈관이 손가락으로 이사 오는 셈인데, 그 혈관을 통해 괴사한 손가락에도 영양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한다. 4일 정 교수가 전화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식하면 손끝으로 가는 신경을 하나라도 더 잘 이어주기 위해 봉합을 해서 손가락을 하나로 묶어놔요.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다섯개로 가르는 거예요. 다음은 손가락에 이식한 살을 다듬어 손가락을 날씬하게 만들고 자기 뼈를 서서히 늘려가는 단계인데, 워낙 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라 손가락 살을 다듬는 단계까지는 못했어요.”

손가락과 영원히 작별한 뒤 박씨는 한동안 ‘제육감’을 느껴야 했다. ‘제육감’이란 근육이나 힘줄, 관절 등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에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인데, 자신이 자신의 것임을 느낄 수 있는 ‘고유감각’이다. 정상인의 제육감은 무의식에 머물지만 절단장애를 입은 사람들의 제육감은 의식의 세계로 떠올라 ‘몸이 없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 손이나 발을 절단한 사람들에게는 ‘환상통’이 나타나기도 한다. 환상통은 절단된 손이나 발이 여전히 중추신경계와 연결돼 있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상 통증’이다. 절단해 몸은 사라졌지만 두뇌의 유연성이 고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제육감’과 ‘환상통’을 통해 손과 두뇌,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박씨도 손가락을 절단한 손의 모양이 눈에 보이는 전부가 아니라는 ‘뇌의 신호’ 혹은 ‘손의 표현’을 느꼈다고 했다.

“수술하고 처음에는 계속 손가락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붕대를 열고 확인한 후부터는 달라졌죠. 손가락이 붙어 있을 때랑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그나마 있을 때는 어쨌든 매달려 있잖아요. 꿈을 꾸면 요술공주가 나타나 손가락을 살려주곤 했어요. 그런데 자른 후에는 그마저 희망이 없잖아요. 그때부터는 그 꿈이 악몽이 됐어요.”

수술 뒤 혼란에 대해 부인 정정엽(42)씨가 박씨를 대신해 설명했다. 남편은 인생의 목표였던 산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술로 지냈다. 퇴원한 지 여섯 달이 지날 무렵 가족들과 함께 탄 차량을 운전하던 박씨가 지하도를 지나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때 제가 순간적으로 놀라서, 운전을 왜 그렇게 하냐고 했더니 정헌씨가 운전대를 탁 놓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손가락이 없는데 어떻게 운전을 하냐’며…. 그때 정헌씨도 못 하는 게 있구나, 그때부터 진짜 장애를 받아들이게 됐던 것 같아요. 한두 달 재활훈련하고 났더니 많이 좋아지더라고요.”

박씨의 손은 이식수술이 끝난 그대로 ‘뭉뚝한’ 손 그대로다. 박씨는 그 손으로 차량 핸들을 잡고 운전을 했다. 식당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불편함 없이 쥐었다.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기는 조금 힘들지만 다들 ‘엄지족’ 아니냐면서 괜찮다며 웃었다. 불편하지 않으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예전처럼 암벽을 오르지 못할 뿐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다며 남은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렸다.

엄지손가락은 다섯 손가락 중 40%의 역할을 ‘혼자’ 해내는 손가락이다. 물론 엄지손가락만 있고 나머지 손가락이 하나도 없다면 손의 기능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장애진단 때 엄지손가락의 유지 여부는 중요한 기준일 만큼 엄지의 역할은 크다. 인류학에서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과의 골이 깊어지고 엄지손가락의 길이가 늘어나 엄지손가락이 손바닥 및 다른 손가락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된 사실을 인간 진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한다.

가장 고등한 영장류인 침팬지와 보노보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완전히 마주 볼 수 있어야 가능한 ‘핀셋 집기’를 한다. 이 동작은 고도의 섬세한 감각과 정밀운동 능력을 요하는 것으로 눈과 손의 협동작업을 조절하는 것이 필수적인 만큼 ‘뇌’와 관계가 깊다. 박씨의 손 역시 엄지손가락이 있어 한 마디 남은 ‘짧은’ 검지손가락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었다.

“미운 손이죠. 솔직히 미운 손이죠.”

사고 이후 지금까지 박씨는 손가락 없는 손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중이다. 2006년 5월 후배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실크로드 횡단에 나서는 목표를 정한 뒤 그의 삶의 대한 태도는 모험가 시절로 귀환했다. 손가락이 없는 박씨는 산악용 자전거(MTB)의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는 것만 한 달 넘게 연습해야 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달릴 때 동료와 경쟁하고 날리는 모래바람과 싸우면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과 몸의 상관관계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알피니스트 시절 느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몸은 둘째예요. 몸이 생각을 지탱해준다기보다 자기가 오르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열정, 열정이 몸을 버티게 하는 거예요. 사막에서 15일 동안 달리면서 몸에서 악취가 났어요. 그제야 3년 넘게 쌓였던 저의 내면적 고뇌가 날아갔어요.”

박씨는 자신이 유명한 산악인이 아니었다면 손가락이 없는 사람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장애를 입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박씨는 스스로 장애를 떨쳐냈다. 겨울이면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손이 빠른 속도로 꽁꽁 얼고, 혼자 있을 때 바늘이나 동전을 떨어뜨리면 줍지 못하고, 타이핑을 하지 못하는 등 ‘작은’ 어려움이 더는 문제 되지 않았다. ‘죽음을 피해가는 행위예술’ 같던 산악인의 삶이 손가락과 함께 끝났다는 사실에 마음은 아프지만 다른 목표가 생겼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어떤 일들을 했나요?”

“2011년 8월 히말라야 2400㎞ 패러글라이딩을 마쳤고요. 8년 동안 강연을 다니며 기업인이나 대중에게 도전과 꿈을 심어줬어요. 갤러리를 열어 히말라야를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고요. 최근에는 히말라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서관이나 문화시설을 만들어주려고 법인을 만들었어요. 갤러리를 만들려고 건물 리모델링할 때 건축가들이 저보고 장애인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니까요.”

손이라는 작은 신체는 뼈, 혈관, 근육, 힘줄이 다 들어 있다. 손끝은 눈보다 예민하게 정보를 습득한다. 손의 내재근은 기억을 한다. 그래서 손을 ‘마음의 눈’이고 ‘마음의 대행자’라고 부른다.

그의 ‘손’은 언제나 산에 머물러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돈을 벌었던 이유도 8000m 산에 오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열었던 포장마차 가게 이름이 ‘8000m’였다.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 산행을 다니며 좋아하는 산을 타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고독이 짙을수록 기쁨이 크다는 산악의 진짜 즐거움을 맞보기 위해, 달빛만 비치는 밤에 히말라야의 정적을 느끼며 밤새 혼자 산을 오르기도 했다. 영원한 ‘산 사나이’ 박씨에게 ‘장애 4등급’의 손은 어떤 손일까.

“미운 손이죠. 솔직히 미운 손이죠. 그런데 손 때문에 산을 탔고 손 때문에 산을 잃어버린 복잡한 마음이랄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 있어요. 영원히 저만 가져가야 하는….” 그는 산에서 맛본 고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 사람이었다.

헤어지는 길, 박씨는 자신이 쓴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진주가 처음이라는 손님에게 구경을 시켜주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다섯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그림자가 따라 움직였다. 나의 손가락이 박씨의 선물이었다.

진주/글·사진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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