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25주년 기획 ㅣ 2013 대한민국 ‘진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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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다양한 삶의 방식 개척”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 뛰어나
변방에 주목 대안적 삶도 고민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는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속삭이죠. 우리는 ‘성공’을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여성 400여명이 알랭 드 보통에게 시선을 꽂아두고 있었다. 지난 3일 오전 서울 구로구 디큐브시티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에서 스위스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 보통은 ‘일상의 지혜를 다시 소개하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청중 500여명 중 남성은 100여명에 불과했고, 이 중에서도 20대 남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수는 열에 예닐곱을 차지하는 20대 여성이었다. 같은 날 저녁 7시 마포구 연남동에서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연 ‘인문학 페스티벌’도 상황은 비슷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강연을 듣는 청중 70여명 중 절반 이상이 20대 여성이었다. 강연을 들으러 온 이슬기(23)씨는 “뭔가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점이 좋아 강연회나 토론회 등을 종종 찾는다”고 말했다. 요즘 각종 강연회나 토론회, 포럼 등에선 20대 여성들의 기세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남성들 자체가 이런 자리에 별로 없는데다 20대 남성들은 가뭄에 콩 나듯 눈에 띄는 정도다. 각종 집회 현장에서도 20대 여성이 주축이 된 지 오래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20대 여성들의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 곳곳의 숨은 보석 같은 20대 여성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들이 새롭다.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기대에 맞추느라 안간힘 쓰길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의 뜻을 좇아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이동하는 삶을 선택하곤 한다. 이들의 삶의 태도에도 도드라진 특성이 진취적이고 주체적이라는 점에서 ‘진주녀’라고 명명할 수 있다. 201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변다희(22)씨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성적이 나빠서도, 가정형편이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외에 대학에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대신, 그는 인문학 연구 공동체인 ‘수유너머’에서 스스로 세상을 고민하며 사람들과 생각을 나눴다. 그는 거기서 니체, 마르크스, 카프카, 들뢰즈 등을 읽었다. 변씨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지난 1년을 지냈다. 흔히 말하는 ‘운동권’도 아닌 그가 해군기지 건설 반대활동에 몸을 던진 것은 여행길에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경고 사이렌이 울리는 마을은 꼭 전쟁터 같았어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행을 멈추고 강정 평화지킴이로 또다른 여행을 시작했다.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5년 넘게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강정마을의 활동가 대부분은 20대 여성들이다. 지난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어도, 이들 진주녀는 발랄하게 투쟁한다. 아침저녁으로 “원숭이도 따라 출 수 있다”는 ‘강정마약댄스’로 신명을 돋우고,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강정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강정마을 여성활동가 12명에게 부과된 벌금 4800만원을 모으려고 포장마차를 한 여성도 있다. 김가미(22)씨는 올 1~4월 어머니와 함께 ‘힐링포차’를 끌고 서울·대전·대구·부산·포항을 누볐다. 4800만원을 벌어들이기까지는 석달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강정의 ‘언니’들이 추운 겨울 감옥에 가는 것만 막아달라”는 진주녀의 호소가 통한 결과였다. 진주녀는 우아하고 고상한 ‘알파걸’과 다르다. 알파걸이 우리 사회 중심부에 자리잡은 소수의 엘리트 여성인 것과 달리, 진주녀는 주변부에 주목한다. 주목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소하지만 선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서지애(29)씨는 2년 전 농부가 됐다. 주위에선 ‘왜 하필 농사냐’는 반응이 빗발쳤다. “젊은 사람이 할 일이 없냐”는 통박도 여럿 날아왔다. 석사학위까지 딴 20대 여성이 멀쩡한 직장을 두고 농부가 되겠다니, 그럴 만도 했다. 서씨는 식물병리학을 전공했다. 논문을 쓰면서 농민들을 많이 만났는데,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기력이 쇠한 노인들은 농사일을 무척 힘들어 했다. “그때부터 연세 많은 분들이 크게 힘 안 들이고 지을 수 있는 농사가 없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서씨는 해답을 고사리에서 찾았다. 밭에서 재배할 수만 있다면, 고사리는 병충해에 강해 누구나 쉽게 기를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씨는 경북 안동에서 모종을 통한 고사리 노지재배(밭의 자연적인 조건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에 최근 성공했다. 지금까지 고사리는 산과 들에서 직접 캐거나, 그렇게 캔 고사리 뿌리(종근)를 다시 밭에 심어 번식시킨 뒤 수확해왔다. 서씨는 “고사리 재배법을 널리 알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는 진주녀도 있다. 이다슬(28)씨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왔다.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에 입학했으며, 취직을 해야 할 때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는 멕시코를 2년 동안이나 여행했다. “남들이 위험하다거나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삶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지론을 몸소 실천해 온 그는 현재 공정여행협동조합에서 ‘여행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환경과 지역경제를 살리는 공정여행의 가치를 가르치고 또 함께 배우는 중이다. 진주녀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회·심리적 상황에 처한 20대 남성과 쉽게 비교된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여전히 우리 시대 많은 20대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빨리 취직해서 돈 모아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정규직이 되기 힘든 상황에서, 남성들은 좁은 취업문 앞에만 길게 줄을 서 있는 반면 여성들은 그런 강박이 비교적 덜하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남성들이 가부장 문화가 주는 전통적 성 역할 의식에 사로잡혀 오로지 정규직 취업에만 매달릴 때, 여성들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고민하며 새로운 형태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30대 이상이 되면 달라질 수 있지만, 여성이 20대에 느끼는 우리 사회의 역할 기대가 남성에 견줘 자유로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여성이 대안적 삶을 고민하고 변방으로 눈을 돌릴 여유와 여지가 크다”고 분석했다. 성평등 의식이 확산됐음에도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진주녀들은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취업이나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차별에 노출돼 있는 등 스스로 약자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또다른 약자들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있다. 이들이 주변부로 눈을 돌리고 대안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고민하는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가 변화의 원동력으로서 진주녀의 에너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나임윤경 연세대 교수(문화학 협동과정)는 “재미난 상상력으로 대안적 삶을 고민하고 변방에 주목하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다양해지고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우리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욱 최유빈 기자 dash@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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