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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소주병과 빨간봉이 뒤엉키는 한여름 경포해변의 밤

등록 2012-08-10 11:51수정 2012-08-11 13:46

4일 자정 무렵, 백사장을 청소중인 장신중 강릉경찰서장. 장 서장은 하루 3번 이상 해변을 청소한다.
4일 자정 무렵, 백사장을 청소중인 장신중 강릉경찰서장. 장 서장은 하루 3번 이상 해변을 청소한다.
[토요판] 르포 2012년 8월 어느날 경포해변에서 생긴 일
강릉 경포에는 다섯개의 달이 뜬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호수와 술잔과 님의 눈에 뜬 ‘다섯개의 달’이 ‘한 잔하라’며 피서객들을 유혹하네요. 그래서 강릉 경찰은 경광봉과 쓰레기봉투를 들고 밤마다 백사장을 걷고 또 걷습니다. 주취자들로부터 경포해변과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래요. 해변에서의 음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해변 청소에 여념이 없는
강릉경찰서장의 어깨띠엔
“경포해변 내 음주를 자제…”
번영회원들도 쓰레기 줍기
그들의 가게 포스터엔
“음주행위는 불법이 아닙니다”

삼삼오오 청춘남녀들
술자리에 즉석만남
“지난번 왔을 때랑 비슷한데…
우린 신경 안써요”

여름 휴가가 절정이던 지난 3일,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3시간을 달려 강원도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 승객들을 내려놓았다. 강릉시내버스를 타고 20분을 더 달렸다. 오후 6시30분 경포해수욕장 입구에 도착했다.

경포 해변은 성수기답게 활기로 가득했다. 물놀이를 막 끝낸 20대 남자 여럿이 젖은 머리를 말리며 지나갔다. 해수욕장 밖 상점들은 간판불을 밝히며 피서객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횟집과 식당, 건어물가게와 편의점, 술집 등이 해변을 따라 이어졌다. 상점 뒤로 솟은 모텔마다 ‘빈방 없습니다’란 문구를 내걸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시각, 허병관(51) 경포번영회장은 마을 주차장에 위치한 번영회관에서 피서객에게 나눠줄 전단지와 설문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피서객을 대상으로 해변내 음주 ‘규제’에 관한 생각을 묻는 내용이었다.

한쪽엔 경찰 현수막, 한쪽엔 상인 현수막

“음주 단속이오? 법적 근거가 없어서 못해요. 알아서 자제해달라는 건데 경찰서장 말 한마디에 단속하는 것처럼 보도가 됐어요. 지금도 해변가면 다 마셔요. 단속 안한다고 좀 써주세요!”

펜션을 운영하는 허 회장은 경찰의 경포해수욕장 음주 ‘단속’ 관련 보도가 나간 뒤 피서객이 줄어 지역경기가 다 죽었다며 성을 냈다. 박종식(47) 번영회 사무국장도 말을 거들었다. “경포는 바다가 전부에요. 수심이 깊어서 백사장말고는 놀이 공간이 없는데 젊은 애들이 와서 뭐하고 놀아요. 시행할거면 상인들과 미리 상의를 하던가요.” 이들은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청와대와 경찰청, 국무총리실 등에 해변내 음주를 허용하라는 내용의 탄원서나 진정서를 낼 계획이다. 해변으로 향하는 길, 번영회원이 운영하는 가게마다 ‘경포해변에서의 음주행위는 불법이 아닙니다’라는 문구의 포스터를 내걸고 있었다.

얼마 전 경포에서는 해변내 음주를 두고 경찰과 상인의 갈등이 빚어졌다. 지난달 11일 강릉경찰서가 ‘경포해변 음주금지 추진 간담회’를 열어 해변내 음주행위를 단속한다고 밝힌 것이 갈등의 씨앗이었다. 경찰은 경포해변에 유독 쓰레기와 주취자가 많아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경찰의 이런 방침은 일부 언론의 ‘받아쓰기’를 통해 ‘사실’이 됐다.

경찰의 음주 단속 방침에 대해 상인들은 즉각 집단휴업의사를 밝히며 반발했다. 며칠 뒤 음주 단속에 관한 조례나 법조항이 없어 경찰의 단속이 불가능하다는 ‘진실’이 다시 알려졌다. 경찰의 ‘졸속 단속’에 대한 비판이 빗발쳤다. 이후 강릉경찰서는 ‘단속’을 ‘적극적 계도’로 정정했고, 강릉시는 뒤늦게 관련 조례 제정에 착수했다. 대신 경찰은 경포 해변에서 절주 권유·청소 등 계도 활동에 나섰다.

밤 9시 경포해수욕장 입구에서 다시 만난 허 회장은 10여명의 번영회원과 함께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김춘자(64) 스위트모텔 사장도 파란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있었다. “경찰이 쓰레기를 주워요. 그래서 우리도 쓰레기를 주우며 말해요. ‘술은 드셔도 되는데 과음하지 마세요’라고요.” 백사장에서 ‘민속 못박기’ 게임(못박는 놀이)장을 운영하는 한 남성 회원이 말을 더했다. “청소는 시에서 하는 거잖아요. 무슨 사건이 터진 것도 아니고, 경찰이 쓰레기 제대로 버리라고 빨간봉 들고 다니는 게 말이 됩니까? 위압감 느끼지않겠어요?” 이 남성 바로 옆에 5명의 제복을 입은 경찰이 빨간 경광봉을 들고 서있었다. 해수욕장 입구에는 경찰이 걸어둔 흰색 ‘음주 자제’ 현수막과, 번영회 쪽에서 내건 노란색 ‘(해변내) 음주행위는 불법이 아닙니다’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같은 시각, 장신중 강릉경찰서장(58)은 해변 청소에 여념이 없었다. 백사장 밖으로 걸어나오는 장 서장의 손에 속이 꽉 찬 파란색 20리터짜리 종량제봉투가 들려있었다. 어깨에는 ‘경포해변 내 음주를 자제합시다’라고 적힌 하얀띠를 두르고 있었다. 여름 해변과 어울리지 않게 동계 정모를 쓴 그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기자가 다가가자 그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피서객들) 스스로 자제하는 건 기적이에요. 아, 기분 무지하게 좋아요. 작년에 더러웠던 해변 사진 보셨죠? 그 많던 주취자들이 올해는 한명도 없어요.” 쓰레기통 안에 들어간 장 서장이 수북한 쓰레기를 두발로 꾹꾹 밟으며 말을 이어갔다.

3일 강릉 경포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로에 걸린 두 개의 펼침막. 음주를 자제하라는 펼침막(위)은 강릉시와 강릉경찰서에서, 음주행위가 불법이 아니라는 펼침막은 경포번영회에서 걸었다.
3일 강릉 경포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로에 걸린 두 개의 펼침막. 음주를 자제하라는 펼침막(위)은 강릉시와 강릉경찰서에서, 음주행위가 불법이 아니라는 펼침막은 경포번영회에서 걸었다.
“기적이에요, 주취자가 한명도 없어요”

“가볍게 맥주 한 잔 하는 건 말 안하죠. 그런데 술이랑 쓰레기가 공통돼요. 술취한 사람에게 이성을 기대하기 어려우니까 계도하는 거에요.” 장 서장은 번영회 상인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해수욕장 입구에서 3분 정도 떨어진 강릉경찰서 경포치안센터 여름파출소로 향했다. 파출소 앞에는 1년 전 경포해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사진 속 해변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해변청소를 함께 한 강릉경찰서 경찰발전행정위원회 소속위원 12명도 파출소로 속속 모여들었다. 서장과 위원들이 파출소 한쪽 소파에 앉아 이온음료 등을 마시며 담소를 이어갔다. 발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고광록 변호사가 말했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단속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닌 것같다. 오락실 단속이 불법 오락실 단속을 말하는 것처럼 음주 단속 역시 불법적으로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거나 공연음란 행위를 하는 경우를 단속한다는 건데 그게 확대해석됐다.” 장 서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최재일 강릉경찰서 생활안전계장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장님이 2005년부터 3년동안 강릉 해변치안을 관장하는 강릉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을 하면서 해변내 쓰레기문제를 많이 고민해오셨어요.” 장 서장은 지난해 12월 강릉경찰서장으로 취임했다.

장 서장은 경포해변에 오는 젊은이의 놀이문화부터 비뚤어졌다고 비판했다. “방팅이라고 들어보셨죠. 경포하면 인터넷 연관검색어로 ‘짝짓기 천국’이라고 나와요. ‘짜릿한 만남. 결과는 책임못짐’. 참, 기가 막혀서. 계도활동 이후 그런 아이들이 안오니 이 정도는 유지되는 거에요. 상인들은 그런 아이들이 와야 장사가 잘 된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한 위원이 서장에게 물었다. 박용진 강릉원주대학교 교수였다. “그런데 놀러 오는 애들의 욕구도 이해해줘야하지 않습니까. 바다에 오면 해방됐다는 생각이 드는거죠. 지금처럼 젊은 애들의 놀이공간이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하지말라하는 것보다는 시청과 공조해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 서장은 박 교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위원들이 파출소를 나가고 10분이 지난 밤 10시20분, 장 서장이 다시 움직였다. 손에는 다시 파란색 종량제봉투를 들었다. 지난달 13일 경포해수욕장 개장 이후 22일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하루 3차례씩 해변 청소를 해왔다는 장 서장이다.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담배꽁초를 손으로 줍던 그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살 좀 빠졌죠. 입안이 다 헐었어요. 그래도 체질이에요.” 1년 전 해변 사진이 인쇄된 판넬을 든 최 계장이 장 서장 뒤를 따라다녔다. 최 계장은 “해변 청소를 시작한 후 딱 이틀 쉬어봤다”면서도 “서장님이 열심히 하시니 직원들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며 웃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해변은 젊어졌다. 번영회원들과 경찰들이 서있던 주출입로에서부터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한껏 멋을 낸 10~20대 남녀가 무리지어 해변을 서성였다. 몸매가 드러나는 미니원피스와 속옷이 다 보이는 망사티 등을 입은 여자 5명에게 접근한 남자 2명이 소리 질렀다. “우리랑 같이 놀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요. 이 경포에서!” 백사장 안도 다르지 않았다. 펑펑. 여기저기서 폭죽이 까만 밤하늘을 수놓았다. 매캐한 폭죽연기가 마치 구름처럼 보여 하늘과 백사장을 더 가깝게 느끼게 했다. 돗자리 위에서 카스 1.6리터짜리 패트병을 두고 종이컵을 홀짝이던 10대 후반의 여자 3명에게 2명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몇 명이서 오셨어요? 술 더 필요하지 않아요? 저희도 3명인데 맥주 한 잔해요. 너무 깊이 생각하시면 안돼요. 경포에 사람은 많지만 인연을 찾기는 어려워요. 저희 마음에 안드세요?” 여자들이 고개를 저었고, 남자들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사람 많은 백사장에서 장 서장과 최 계장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최 계장이 손에 든 빨간 경광등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장 서장이 말을 걸었던 돗자리에 가보니 양념통닭과 마른 오징어, 카스 355ml 캔맥주 한박스가 놓여있었다. 맥주 10캔 이상 마신 상태였다. 창원에서 친구 2명과 함께 놀러왔다는 20대 남성 신원경씨의 얼굴은 이미 발갰다. “경찰이 이거 먹고 치우고 가셔야 합니다하길래 즐겁게, 깔끔하게 먹고 가겠다고 했어요.” 신씨에게 남은 맥주를 다 먹을거냐고 묻자 “아이스박스에 양주도 있는데?”라고 되물었다. 뒤늦게 자리로 돌아온 친구 2명이 까칠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술먹으러 오는거죠. 쓰레기만 안버리면 되잖아요.” 맥주와 보드카를 마시던 대학생 홍준표(28), 김남주(28)씨도 경찰의 계도를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술판이 줄었나 피서객이 줄었나

해변을 오가는 5명의 경찰은 경광봉만 흔들 뿐이었다. 밤 11시 업무를 마친 의경들이 말했다. “쓰레기 잘 버려달라하고 술 좀 줄이라고 하죠. 너무 많이 들고간다 싶으면 불러서 주의주는 정도에요.” 해수욕장 입구를 지키던 한 경사가 이름표를 가린채 말했다. “술병들고 가는 젊은이들 봐도 제재할 근거가 없어서 부탁만 하는 상황이죠. 피곤해도 서장이 하니까…” 경찰은 밤 12시까지 해변을 청소하거나 순찰을 돌았다. 3일 해변내 음주 규제 캠페인 및 청소에 나선 경찰은 모두 21명이었다. 4일은 23명이었다.

4일 밤 11시30분, 백사장 분위기는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남자 6명 사이사이에 여자 6명이 앉은 돗자리 옆에서 한 남성이 안주로 먹을 쥐포를 굽고 있었다. 화염병처럼 소주병을 모래에 박아 병입구에 불을 붙였다. 어디선가 통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부르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는 남자 무릎에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머리를 대고 누워있었다. 개장 후 격일로 익수자구조 등 해양안전을 책임지는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소속 최현군 순경(34)에게 경찰 계도 후 달라진 해변풍경에 대해 물어봤다. “이상하게 올해는 피서객이 줄었어요. 어제(3일) 전까지는 사람이 정말 없었거든요. 계도해서 좋아진건지 사람이 안와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어요.” 최 순경의 무전기에서 2번 포스트에 입수자가 있으니 살펴보란 지시가 들렸다.

5일 자정이 넘어서도 해수욕장 밖 편의점 지에스(GS)25 경포대점은 여전히 술을 찾는 피서객들로 붐볐다. 병맥주 5병, 과자와 소시지 등을 산 20대 남자 3명은 백사장에서 술을 마실 참이었다. 소주와 1.6리터 맥주 2병을 산 25살 남자 3명도 백사장으로 향했다. 해변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일부 피서객들은 경찰의 계도행위에 짜증을 냈다. 백사장에서 동료들과 캔맥주를 마시던 이유나(29)씨가 말했다. “경포가 헌팅하는 장소로 유명하잖아요. 그런 경포 문화 자체가 금주와 맞지 않는데, 단속한다 하면 손님준다고 상인들이 싫어하는건 당연하죠.” 옆에서 서영은(29)씨도 한마디했다. “2년 전에 왔을 때랑 경포는 비슷해요. 헌팅문화는 오래된 건데 무조건 술이 문제라고 하는 건 말이 안돼요.” 경찰 행정력의 낭비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서울에서 놀러 온 직장인 윤아무개(30)씨의 말이다. “범죄 예방이나 치안유지에 신경써야 할 경찰이 직접 쓰레기청소를 하고 있는 건 좀 그래요.”

이런 지적에 대해 장 서장은 퇴근 이후 시간을 이용해 해변에 나온다며 해변 청소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헌팅문화에 제일 관여된 게 술이에요. 주변이 더러워지면 술마실 위험이 있는 거고요. 사실 담배도 안돼요. 아까 소주병에 불붙여 쥐포 구운걸 봤다고요? 내 눈에 띄었으면 시범적으로 즉결(심판) 보냈을텐데.” 장 서장은 폭죽을 쏘는 피서객에게 다가가 지면과 직각으로 쏘지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백사장 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 쓰레기 수거해 모아주시고 지금 즉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새벽 2시, 강릉시 해변관리본부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해경이 빨간 경광봉을 흔들며 백사장밖으로 피서객을 내보냈다. 듬성듬성 놓인 파란 플라스틱 쓰레기통은 이미 가득차 있었다. 백사장 곳곳에서 각종 맥주캔·맥주병·소주병·과자봉지 등이 발에 숱하게 치었다. 사람들은 백사장을 벗어나 바로옆 소나무숲에 돗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즉석만남에 성공한 젊은 남녀는 근처 횟집이나 술집으로 가서 이야기를 이어가거나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경포의 밤은 길었다.

강릉/글·사진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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