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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김진숙 크레인’은 고철로 팔리고 도크는 텅비어

등록 2012-05-18 21:27수정 2012-05-20 12:13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지난 15일 영도조선소 앞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벌였던 타워크레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지난 15일 영도조선소 앞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벌였던 타워크레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토요판] 르포
한진중공업 노사합의 6개월 뒤
솔직히 무심했습니다. 2011년 11월10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의 고공농성을 끝내고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던 그날, 다 해결됐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192일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떨까요? △정리해고자 1년 내 복귀 △생계비 2000만원 지급 △노사간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 등 한진중공업 노사가 맺은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스물아홉살부터 10년 넘게 몸담아온 회사 아입니껴. 하루아침에 부당 해고를 한다는데 어데 하소연할 곳도 없고, 그래서 길 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입니껴. 불법집회라고 (경찰이) 방송했다는데, 내는 못 들었어예. 집회 신고된 줄로만 알았지예. 자식 둘 부양해는 가장이니 선처를 부탁드림더.”

지난 15일, 부산 거제동 부산지방법원 531호 법정. 180㎝를 훌쩍 넘는 큰 키의 사내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말을 이어갔다. 허석현(40)씨다. 허씨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 94명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제5차 희망버스 행사 때 참석했다는 이유(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로 약식 기소돼 이날 피고인석에 섰다. 허씨의 진술을 끝까지 들은 판사는 “6월12일 오후 10시에 선고하겠다”며 재판을 끝냈다. 재판 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법정을 나선 허씨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 벌금 때려불먼 되지 와 또 오라카노?” 재판 때문에 허씨는 이날 하루 일을 공쳤다. 또 하루를 쉬어야 한다니 짜증이 차오른다. 이달엔 가뜩이나 비바람이 잦아 공친 날이 많았다.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걱정이지만 “함께 일하는 사수(기술자)에게 또 어떻게 양해를 구하냐 말이지.” 허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제5차 희망버스 행사에 참석했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허석현(맨 왼쪽)씨가 지난 15일 재판을 받고 나온 뒤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제5차 희망버스 행사에 참석했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허석현(맨 왼쪽)씨가 지난 15일 재판을 받고 나온 뒤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작년말 이후 수주물량 끊겨
일하는 직원들은
순환 휴직에 월급 반토막

이 핑계로 복직약속 어길까…
정리해고자들은 더 막막
"파업만 끝났지 변한 건 없어"

노조는 둘로 갈라져 무력화
사쪽, 불법파업 158억 끝장소송
조합원들엔 ‘희망버스 벌금’

감옥처럼 높아진 담장…85호 크레인도 철거

허씨는 지난 2월부터 아파트 외벽 도장공사 ‘데모토’(보조)로 일하고 있다. 한진중 영도조선소 기관실 공사부에서 10년 넘게 시운전만 해온 그가 도장 일을 알 턱이 없다. 건강한 몸을 밑천 삼아, 도장공사를 하는 사수의 외줄을 잡아주는 단순노동을 하고 있다.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이는 아찔한 25~30층 높이, 외줄에 대롱대롱 몸을 실은 사수의 목숨이 오롯이 허씨에게 달려 있다. 몸도 피곤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돼서 쓰러지기 일쑤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대략 한달에 150만원. 손에 들어왔다 싶으면 부스러지듯 사라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별수 있나. 마흔 나이, 게다가 한진중 정리해고자 딱지를 달고선 새 직장 찾기가 쉽지 않다. ‘1년 안에 복직시켜주겠다’던 회사는 여태 소식이 없다. 그는 회사가 순순히 약속을 지킬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쌍용차는 뭐 약속을 안 해서 노동자들이 복귀 못 하고 있는 건가예?” 허씨가 담배 한 대를 또 꺼내 물었다.

한진중 영도조선소로 가는 길, 택시기사 김형택(가명·53)씨는 말했다. “다 해결된 거 아잉껴? 작년에 정치인들 많이 오고 국회서 청문회도 하고 그래서 다 원만하게 해결됐다~.” 2011년 11월10일. 김씨의 기억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의 고공 농성을 마치고 85호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던 그날에 멈춰 있었다. 한진중 정리해고 사태가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의 연대와 노사, 정치권의 타협으로 해결한 모범 사례로 꼽혀 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 하지만 당사자들은 한숨만 나온다. “심지어 내 친척들도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냐 합니더. 속 모르는 소리지예. 파업이 끝났지, 해결된 건 하나도 없어예.” 차해도 전국금속노조 한진중 지회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한진중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도조선소 앞 담장에도 불화의 흔적이 여전했다. 도시 미관을 고려해 부산시가 5억원을 들여 조성했다는 2.3m 높이의 테마 담장 위엔 지금 콘크리트 구조물이 덧대어졌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이 담장을 넘은 뒤로, 회사 쪽이 보안상의 이유 등을 들어 6m로 담을 높인 것이다. “흉물스러운 모양 때문에 출퇴근 때 직원들이 감옥에 들어간다, 나간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차 지회장이 말했다. 정문 오른편에 서 있던 타워크레인 85호는 지난해 파업이 끝나기 무섭게 철거됐다. 2003년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 동안 버티다 목숨을 끊었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을 버티다 생환한 이곳은 한진중 노조 투쟁의 상징 그 자체다. “120억원짜리 크레인을 5억원 받고 고물로 팔아 치웠다고 하대요.” 회사 쪽은 시설 현대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차 지회장은 “지긋지긋한 노조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25만㎡ 너비의 조선소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대형 크레인들은 작동을 멈춘 채 서 있고, 배가 있어야 할 도크(야외 작업장)도 텅텅 비었다. 회사 쪽은 “2011년 11월30일 배 두척을 인도한 뒤로는 일감이 끊겨 현장 작업 물량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유럽발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그리스·영국 등 큰손들의 상선 수요가 끊기면서, 한진중은 지난해 12월부터 순차적으로 6개월간 유급휴직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조원은 전체 707명 중 15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시설 보수와 방산(방위산업) 부문 쪽 소일을 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20~30% 선만 돌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박성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가 지난 15일 부산역 광장 앞에 설치된 쌍용차 희생자 추모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박성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가 지난 15일 부산역 광장 앞에 설치된 쌍용차 희생자 추모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휴직자도 해고자도 알바 “기회만 되면 이직”

휴업으로 두달에 한번 나오던 상여가 끊기고, 잔업·야근수당이 빠지니 월급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2년 넘게 지속된 파업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빚더미 위에 앉은 조합원들의 생활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다. 휴직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나아질 거란 희망이 사그라지면서 ‘기회만 되면 회사를 떠나겠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지난주 경쟁업체의 방산부문 설계직 모집에 한진중 설계자 150명 중 70여명이 응모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회사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었다”고 차 지회장이 말했다.

정리해고자들의 불안은 한층 더하다. “전국민 앞에서 약속을 했는데 설마 11월 전 복직 약속을 어기기야 하겠느냐” 하다가도, 휴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을 핑계로 회사가 말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역력하다. 정리해고 노동자 유영진(39)씨는 “몸이 약한 아내가 공장에 취직한다는 걸 말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집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으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면 미안하고 안쓰럽죠. 그런데도 이유 없이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아내와도 자주 다투게 되네요.” 쑥스럽다는 듯 유씨가 웃었다.

한진중은 지금 첫번째 휴직자들의 복직 시점(6월1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상황이 달라진 건 전혀 없다. 회사 쪽에선 “수주가 안 되면 휴업을 연장할 수밖에 없다”고 못박는다. 일감이 없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더 열심히 수주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것 외에 노조도 별 대책이 없다. 하지만 따질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차 지회장은 “경기가 좋을 때 이윤만 쏙 빼먹고 개발투자를 안 하다가 결국 이 사태가 된 거 아니냐”고 얘기했다. 그는 “현대중공업 등이 해양플랜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에스티엑스(STX)가 대형 크루즈 사업에 뛰어들면서 불황 타개에 나서는 동안 한진중은 뭘 했느냐”며 “저가 수주는 절대 안 하겠다고 버티면서 그 부담을 온전히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를 비롯한 노조 관계자들은 “회사가 영도조선소에서 상선 쪽은 정리하고 방산 쪽으로 집중하는 방향으로 사업 규모를 축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불게 되겠지예.”

‘각자도생밖에 길이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 사이의 견고한 연대를, 믿음을 허물고 있다. 그 폐해는 노조가 둘로 갈라져 힘을 못 쓰고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진중에서는 차 지회장이 이끄는 한진중 지회(산별노조)가 출범한 지 석달 만(지난 1월)에 김상욱 위원장이 이끄는 새 노조(기업별 노조)가 출범했다. 그 배경엔 “지난해 노사합의 때 김 지도를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한 것 빼고 노조가 제대로 해결한 게 뭐가 있냐는 조합원들의 불만이 있다”고 박성호 한진중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가 털어놨다. 당시 합의 때 2009년부터 묶여 있는 임단협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는 해결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노조원들이 얻은 게 없다는 피해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는 말이다. 박 대표는 “여기에 복수노조를 만들어 노조를 분열시키려는 회사 쪽의 지원 작전이 먹혀들어갔다”고 덧붙였다. “오랜 파업으로 조합원들이 생활고에 많이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안 합니까. 한푼이 아쉬울 때였지예. 그런데 새 노조 관계자들이 회사 쪽과 합의했다며, 새 노조에 가입하면 당장 명목상 대출 형태로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는데 솔깃하지 않겠어예?”

“가장 힘든 건 노동자들끼리의 분열”

결국 70%가 넘는 노조원들이 새 노조로 넘어갔다. 기존 노조는 아직까지 교섭권을 갖고 있지만, 하위 실무 책임자가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교섭은 실질적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도 오는 7월이면 교섭권을 다수 조합원이 있는 새 노조로 넘겨야 할 판이다. 밥벌이에 바쁜 조합원들이 각지로 흩어져 있으니 총회는 성원이 미달돼 매번 무산됐다. 노조가 출범한 지 7개월 만인 지난 1일에야 겨우겨우 첫 총회를 열었을 뿐이다. 긴밀한 대응책을 만들기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존 노조는 엄청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 노사협상 때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최소화”하기로 합의했지만, 회사는 기존 노조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를 상대로 불법파업에 대한 피해액 158억원을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태세다. 조합원은 조합원대로, 희망버스와 촛불집회에 참가했다가 벌금 폭탄을 맞고 있다. “이번 참에 제대로 손을 봐주겠다는 거 아입니껴? 노조에 158억이 어딨습니껴. 노조를 죽이겠다는 거지예.” 차 지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 힘든 건 사람들 간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지예.” 차 지회장은 “노조가 둘로 쪼개진 뒤로 서로 다른 조합에 속한 이들이 경조사 자리에서 만나도 피하기 바쁘다”며 “어쩌다 마주친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잦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그렇지 사람들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예. 김주익·곽재규 열사가 죽은 지 10년도 안 됐는데….”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들 뵈 싫어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다들 간 뒤에야 퇴근하고 그랬심더. 밥도 노조 사무실에서 라면 끓여 떼웠고예.”

차 지회장은 자신을 비롯한 조합원들의 이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심리치유 프로젝트 ‘사랑방’과 ‘꼼지락’(어린이·청소년 대상) 운영을 시작했다. 우선 정리해고자와 현장 복귀자를 대상으로 매주 한차례씩(월요일 오후 6~10시) 8주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다. “문은 열어놨는데 다들 먹고살기가 힘드니 많이들 못 오네예.”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새 노조로 떠나간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을 많이 씻어냈다”고 말했다. 그 이후론 발을 끊은 산악회나 볼링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쌍용차·전북버스 노조 투쟁 현장을 찾으며 힘을 보태고 있다. 희망버스를 통해 보여준 연대에 대한 부채감을 새기며 싸울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회사가 언제 채찍을 들고나올지 모른다 아입니껴. 새 노조에 가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 실망한 사람들, 다시 돌아올 거라예. 그때까진 굳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랍니더.”

부산/글·사진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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